아직도 그 초식에 대한 파훼법을 모르겠습니다.
주변에서 보면, 부부끼리 사소하게 말다툼을 하는 경우에는 보통 아내가 이기더라고요. 여자분들이 평소에 말도 더 많이 하고, 일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더 전문분야가 많아서일까요. 보통 남자분들이 "알았어, 알았어"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흠.
그런데 이상합니다. 저는 원래 말싸움을 잘하거든요. '상대방이 이렇게 주장하면, 난 이렇게 반박해야지!'라며 머릿속으로 온갖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 해둡니다. 보통 상대방의 말은 제 예상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반격을 준비해 따악! 받아치면, 대충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능했죠. 집에서도 이 방식은 늘 통했고요. 그런데 결혼하고부터는 말다툼이나 의견 충돌이 있을 때 남편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제 말싸움 실력이 줄어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왜 평소에 말수도 적고, 순둥순둥한 이 남자에게만 유독 자주 패배하는 것일까요? 이 남자, 말싸움계의 숨은 고수인 것일까요?
평소에는 다툴 일이 별로 없습니다만, 매년 위기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바로 명절 연휴 때죠. 꼭 시댁에 가서 가급적 오래 머물고 싶은 남편의 마음과, 시댁에 가는 것까지는 오케이지만 일정을 좀 미리 정해두고 남는 시간에는 우리 가족끼리 좀 오붓하게 놀고 싶은 제 마음이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추석이고 구정 연휴고 언제 내려갈지, 언제 올라올지 미리 얘기를 꺼내질 않아요. 최대한 일찍 내려가서 최~대한 늦게 올라오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래서 일정을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 건 항상 제 쪽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며칠에 갈 건데? 미리 부모님께 연락드려봐야 하지 않아?"
"에이, 괜찮아, 적당히 하면 돼. 우리 가고 싶을 때 가면 돼."
"그럼 추석 당일 지나고 가도 돼? 아니잖아."
"당일에는 가야지."
"그러면 마냥 가고 싶을 때 가는 게 아니잖아. 신랑이가 부모님께 일정 좀 미리 소통해 주라. 그래야 연휴 일정을 좀 알차게 짤 수 있잖아."
"알았어. 물어볼게."
싱긋, 남편은 웃으면서 순순하게 대답합니다. 물어보겠다고요. 하지만 믿으면 안 돼요. 말만 하고 안 물어볼 가능성이 80%거든요. 그렇게 이틀이 지납니다.
"신랑아. 시부모님께 연락드려봤어?"
"아, 맞다."
"일부러 안 드리는 거 아니지? 난 도대체 왜 신랑이 연락을 안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직접 연락드려?"
"바빠서 깜빡했어. 진짜 할게."
예쁜 말씨로 바빴다고 하는데, 뭐라고 하겠습니까. 일단 기다려봅니다. 그러나 이틀을 더 기다려도 연락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신.. 랑.. 아... 연락해 봤어?"
"아, 맞다. 연락할게. 지금 할게."
"대체 왜 연락을 안 하는 거야. 이유라도 말을 해주던가."
"진짜 정신이 없었어. 오구오구. 우리 아기 속상했어?"
"오구오구 하지 말고, 연락을 해. 맨날 오구오구로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오구오구~많이 속상했구나. 에이, 잘 해결될 거야."
"아냐 아냐, 그거 아냐. 내가 지금 신랑에게 원하는 건 어디 육아서에서나 나오는 오구오구~ 그랬구나~ 이렇게 마음을 알아주는 게 아니고, 일정을 확인해서 효율적으로 짜는 거야."
"헤헤. 다 해결된다니깐."
"그니깐, 나는 그 해결을 지금 원한다니깐."
가족 단톡 창에 드디어 신랑의 카톡이 뜹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바로 전 주말 오전이 되어서야 말이죠. "저희 언제 내려가는 게 편하세요?" 아니, 이 카톡 하나 보내는 게 그렇게 힘들 일인가요? 미리미리 소통해 주면 어디가 덧나냔 말이죠. 제가 가지 말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늦게 가자고 하는 것도 아닌데요. 하지만 8년째 미리미리 소통해 달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화도 낼 수가 없고요. "오구오구 속상했어? 내가 무심했네. 여보가 속상했겠네." 하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해야 하나요.
네? 남편이 말도 예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일정도 정해졌으니 해결된 거 아니냐고요? 뭐가 문제냐고요? 보나 마나 다음 명절에도 남편이 미리미리 일정 소통을 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속이 답답합니다. 이제 곧 다가올 구정 연휴에도 마지막 순간에야 시댁에 내려가는 일정이 정해지고, 앞뒤로 애들과 놀러 갈 일정을 따로 정하거나 예약을 해두지 못할 상황이 되는 것이 싫은데요. 남편에게 '미리미리 일정 소통을 해줘'라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요구해도, "오구오구, 여보가 속상했구나"로 답변이 돌아올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합니다. (결국 일찍 가서 늦게 오게 되어, 에이 그냥 쉬자, 하고 연휴가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것도 슬프고요. 도련님네는 부모님께 미리 양해를 구하고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친정 먼저 다녀오고 시댁에 나중에 오겠다고 하기도 하는데 말이죠!)
아내의 필승 스킬이라는, {(삐진 티를 낸다)-남편이 "왜, 화났어?"라고 물어보게 만든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라고 되묻는다} 기술을 써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