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이 깊어갈 때 나선 산책길은 고요합니다.
늦은 밤인데다가 날씨마저 추우니 인적이 끊겼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은 따뜻한 공간에 머무나 봅니다.
아, 괜히 나왔나요.
춥긴 추웠습니다.
김이 서린 안경 너머 가로등이 환히 빛납니다.
그런데 둥근 보름달 같은 가로등불 사이로 초승달이 고개를 내밀었네요.
가로등이 워낙 밝아서 어쩌면 빛이 가릴 수도 있었을 텐데,
작은 초승달은 꿋꿋하게 제 존재를 드러냅니다.
달을, 달빛을 가리려 해도
달은, 달빛은 가려지지 않습니다.
이렇듯 진리가 해체된 시대라고 해도 진리는 가려지지 않겠죠.
산책을 하다 보면,
자꾸만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떨어진 동전이라도 찾으려는 걸까요.
아니면 머리가 무거워 자꾸만 처지는 걸까요.
애써 고개를 들어 하늘과 나무와 단풍을 보려 합니다.
그 덕분에 거대한 빛에도 압도당하지 않는 달을 볼 수 있었네요.
바람이 불어도 나목에 붙어 있는 나뭇잎이 있고,
도심의 불빛이 환해도 제 빛을 비추는 달이 있습니다.
나는 나뭇잎과 달을 얼마나 닮았을까요.
휘황찬란한 가로등보다 자꾸만 달이 눈에 밟히는 가을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