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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하나 뚜렷하지 않은

by 글담



해가 기울고 하루가 저물어 갈 무렵,

카페 안은 방금 떠난 손님들이 남긴 말이 흩날리는 듯합니다.

갑자기 찾아온 일시적인 고요는 또 다시 소리로 채워지겠죠.

안에서 밖으로 나가려니 둥근 달이 이제 막 떠오르려 합니다.

카페의 옥상에 걸린 등불보다 희미한 존재로 비치지만,

곧 어둠이 깔리면 옥상 너머 세상을 지배하겠지요.

뚜렷하나 뚜렷하지 않은,
뚜렷하지 않으나 뚜렷한 달빛을 만나러 갑니다.


오랜만에 학생들에게 글쓰기 강의를 하러 갔습니다.

여고 도서부 아이들입니다.

수줍어 하면서도 고맙게도 강의를 잘 들어줍니다.

감각으로 자신을 표현하랬더니 저마다 궁리를 하며 글을 씁니다.

자신을 물로, 혹은 강아지로 비유하며 모든 감각의 표현을 해냅니다.

아이들이 순서에 따라 자신을 소개하자,

다른 친구들에게 어떻게 이해했는지 물었습니다.

무슨 뜻으로 각자만의 해석이 됐는지 하나둘 입을 뗍니다.

듣는, 혹은 읽은 느낌은 제각각입니다.

글과 말은 이렇듯 독자와 청자의 몫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뚜렷하지 않은 표현에 부끄러워했지만,

나에게 그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뚜렷한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뚜렷하거나 뚜렷하지 않거나.

뚜렷하나 뚜렷하지 않은.

이 두 문장의 의미는 다릅니다.

‘의미와 목표가 분명한 세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도 뚜렷하거나 뚜렷하지 않은 이로 나뉘지는 않습니다.

뚜렷하면서도 뚜렷하지 않은 존재이죠.

그래서 쉽게 망각하다가도 어느 날 망치로 때린 듯 불쑥 떠오르곤 합니다.


카페의 등불과 희멀거니 떠 있는 달은 부드러운 빛을 뿌립니다.

뚜렷하지 않으면서도 그 무엇보다 뚜렷한 불빛.

겨울은 또 한 해를 찬바람으로 밀어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뚜렷하나 뚜렷하지 않은 시간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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