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높이로 쌓은 낮은 담장

by 글담



기다란 담장은 세월을 덕지덕지 묻힌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오랜만에 맞이한 화창한 날씨.

눈은 하늘을 줄곧 바라보다가 담장으로 옮겨갑니다.

낮은 담장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높이로 다가옵니다.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중세의 흔적까지 남아 있는 곳이라서 그만큼의 시간인지,

아니면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금세 바래졌는지.

여행이라는 환상의 안경으로 바라본 착각일 수도 있겠죠.

그걸 알지만 구태여 의심의 눈길을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여행이니까요.


누군가에게는 보호막이 되어줄 담장이었을 텐데,

지금은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풍경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민들은 아주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을 경계하기는커녕 반가이 인사합니다.

아, 이 또한 경계를 감추기 위한 인사라고도 하던데.

어쨌든 풍경과 사람은 무심히 흩날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그곳에 있습니다.


남들과 다르지 않은 보통의 여행입니다.

그들과 다를 게 없는 유유자적입니다.

굳이 여행을 통한 깨달음을 얻으려 애쓰지 않습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가는 여정은 아니지만,

마음이 가는 대로 떠나는 길은 아니지만,

구속받을 게 없는 발걸음입니다.


낯선 나라의 작은 마을은 잠시 여행의 설렘과 두려움을 잊게 해줍니다.

그동안 너른 대지와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

거대한 구름 떼와 머나먼 지평선,

탄성을 자아내다가도 마음을 주눅 들게도 했던 타국의 풍경이었습니다.

감탄과 한숨이 얽히고설킨 마음을 낮고도 길게 이어진 빛바랜 담장으로 달랩니다.

세상을 품을 가슴은 못 되더라도 삶의 온기는 느낍니다.

이만하면 괜찮은 여행을 다녀온 듯하네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