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맥락이 짙게 배인 공간의 의미를 깨달을 때,
그 공간은 마음속으로 들어오나 봅니다.
재래시장과 꾸불꾸불 이어진 좁은 골목길.
이런 곳이 그토록 정겨운 것도 그곳의 삶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시간이 머문 듯한 그 공간들은 무수한 삶의 시간이 흘러간 곳이죠.
그 흔적을 허공에서 매만지며 또 한 번 떠나는 가을을 공간에 담습니다.
골목길을 돌아 나오니 누군가 붓칠을 한 하늘이 보입니다.
하루 만에 겨울을 맞이한 황망함에 몸은 움츠려도 눈은 위를 향합니다.
땅만 보고 종종 걸음을 걸으려니 아직은 가을에 대한 미련이 남았나 봅니다.
붓칠을 한 늦가을,
아니 초겨울의 하늘 밑 나무는 앙상합니다.
앙상한 나머지 그 앙상함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고요.
추운 날의 무료한,
오전이 오후로 넘어가는 때.
골목길 안 단골 카페에 들어가니 또 다른 단골이 앉아 있습니다.
뭔가 찔리는 듯 슬며시 웃습니다.
“책 한 권 또 선물해야겠네.”
약속한 글을 쓰지 않은 그에게 나 또한 웃으며 말을 건넵니다.
제 글쓰기 수업에 참여했다는 인연으로 몇 년 째 책을 바치고 있습니다.
약속한 날짜까지 글을 제출하지 않으면 책을 선물하기로 했거든요.
나는 쏠쏠한 재미이겠지만, 그로서는 고역일 테죠.
뭐, 어쩔 수 없죠.
그의 고역보다 나의 재미가 우선이니.
며칠 간격으로 내리던 비가 그치고,
며칠 동안 잠잠하던 바람이 매섭게 붑니다.
하늘에 붓칠을 한 게 바람이었습니다.
나무에 쓸쓸함을 더하고,
하늘에 미련을 남긴 채,
바람은 겨울이 왔으니 책을 덮으라고 합니다.
책보다 따뜻한 손을 맞잡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