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연주하는 피아노

by 글담

달을 따라 걷습니다.

어느덧 달을 뒤로 한 채 홀로 떠 있는 별을 따라 발걸음을 옮깁니다.

낮게 깔린 뭉게구름은 어느새 흘러가고,

밤하늘은 맑은 어둠으로 달빛과 별빛을 밝힙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 3시.

아, 아직도 잠들지 못한 이들의 공간에서 빛이 어른거립니다.

길고양이는 이제야 잠자리를 찾아 어슬렁거립니다.

잠들지 못해 밖에서 서성대는 나는 속절없이 가을바람과 까만 하늘에 몸을 맡깁니다.

하릴없이 산책길에 나선 터라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습니다.

절절한 사연의 노래에 깔린 피아노 반주를 듣다가 문득 얼마 전 보았던 피아노가 떠올랐습니다.


낡은 골목에 있는 아담한 성당 마당에 늙은 피아노가 놓여 있습니다.

이미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실한 피아노.

건반은 색이 바랬거나 칠이 벗겨지고,

몸통은 뒤틀려 언제 폭삭 주저앉을지 알 수 없습니다.

제 한 몸 챙기지 못하는 피아노.

뎅그러니 성당 벽에 기대어 자리를 차지한 채 마을을 바라봅니다.

재잘거리는 아이들과 수런거리는 어른들은 무심히 지나칩니다.

용케 버려지지 않은 피아노는 비와 햇살과 바람을 피하지 않고 제 몸에 새깁니다.

시간을.

아마도 노래가 아니라 시간을 연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낡았기에 버려야 하고 외면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버려야 할 쓰레기일 테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되새김질하는 추억일 텐데.

건반을 두드리려다 추억을 망가뜨릴까 봐 멈칫합니다.

누군가의 시간이 새겨졌을지도 모르는데.

마냥 닿지 않을 과거에 사로잡힐 수 없겠지만,

헛된 기대로 채워진 장밋빛 미래에 속아서도 안 되겠죠.

얼마나 많이 속고,

얼마나 많이 무너뜨리고,

얼마나 많이 헤어짐을 겪어야 했나요.


늦은 밤,

공원 곳곳에는 아직도 몇몇 장미가 검붉은 자태로 맞이합니다.

철 지난 꽃이라고 뽑아버리지 않듯이,

낡은 이유만으로 모든 걸 무너뜨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이어 미래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공간도

사람도

세상도

단절보다 이음으로 더불어 존재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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