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담장을 화폭으로 삼아 능소화가 흘러내립니다.
골목 안의 풍경은 멈춰진 시간을 담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름의 끝자락을 보여주는 것으로 흘러가는 시간도 품었습니다.
골목 끝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한걸음씩 안으로 들어갑니다.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막힌 그곳으로.
골목은 시간에 따라 바뀌는 풍경을 담았습니다.
빛의 시간과 어둠의 시간.
늦여름의 초저녁은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은 채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능소화는 뉘엿뉘엿 해가 기우는 이른 저녁인데도 졸고 있습니다.
늦여름의 더위에 지쳤나 봅니다.
불이 켜진 창문이 점점이 이어지는 골목의 풍경은 찾기 힘듭니다.
골목과 골목이 이어지던 미로를 헤매는 소소한 모험도 옛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골목에서 졸고 있는 능소화를 보는 것도 어렵사리 길을 떠나야 가능합니다.
그나마 해가 짧아져서 큰 창문이 달린 카페에서 흘러 나오는 불빛을 바라봅니다.
요즘은 보기 드문 노란 불빛이라서 더 정감이 갑니다.
골목에서 바라보는 창문의 불빛은 경계이자 회귀입니다.
안과 밖을 나누고,
함께하는 것과 소외로 구분하는 경계입니다.
또한 언젠가는 불빛으로 감싸는 그 공간으로 돌아갑니다.
경계와 회귀의 불빛과 나 사이에 능소화는 그저 흘러내릴 뿐입니다.
가끔은 어둑해지기 직전의 골목길을 헤매고 싶습니다.
단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그 시간에 멈추려 합니다.
바람이 바뀌고,
하늘이 바뀌는 시간.
적요한 시간과 공간에 머무는 동안에 느낄 평온함.
평온과 정적을 찾는다고 해서 세상을 외면할 수는 없죠.
세상은 원래 시끄럽습니다.
시끄러워야 살아가는 것이고,
투닥투닥 싸워야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침묵과 순응을 강요당할 수는 없죠.
다만 그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혼자만의 고요함도 즐겨야겠죠.
굳이 성찰의 시간이라고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성찰하지 못해도 차분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시간을 보낸 셈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