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산책을 즐기는 중이었습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다가 아직 피어 있는 장미를 봤습니다.
이토록 추운 날에 장미라니,
이제 곧 12월인데.
질긴 생명력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신기하다는 생각보다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요?
12월까지 저 장미가 피어 있으려나 하고 며칠을 지켜 봤습니다.
하루 또 하루,
12월이 될 때까지 살아 있으라고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왜 그렇게 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12월의 장미를 보고 싶어서일까요?
그렇게 12월의 첫날을 맞았습니다.
12월에 홀로 피어 있는 장미는 고통스러울까요?
추위와 충분히 제공되지 않을 수분에 절망을 느꼈을까요.
장미를 보고 또 보다가 사진을 담고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카페에서 장미를 떠올리며 책을 읽는데 한 구절이 유독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 고통을 감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장미는 고통을 감내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12월의 고통을 감수하는 중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12월의 장미를 기후 변화와 엮어서 생각하기 전에 불현듯 어떤 마음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12월의 장미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시인의 마음이 되어 알고 싶었습니다.
아뿔싸,
생각해보니 시인의 자질이 떨어지는 나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만용이었습니다.
좀처럼 12월의 장미를 읽어내지 못하며 끙끙 앓습니다.
갑자기 카페 뒷자리에 있는 사람이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순간, 내 마음은 왜 철렁했을까요?
엉뚱한 상상에 빠진 걸 들켰다고 여겼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시인의 마음을 갖추지 못한 부끄러움에 멋쩍어서일까요.
오늘따라 질문이 많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대답은 하지 못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