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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순대가 먹고 싶었다.
어묵탕을 먹던 저녁이었나 아니면 그냥 햇빛에 나른한 오후였었나 머릿속에 갑자기 순대가 떠올랐다. 간식으로 먹을까 하다가 내일 아버지가 퇴근하시면 같이 먹자 싶어 한번을 참았다. 근데 또 아버지가 계신 날은 냉동실에 나중에 먹겠다며 넣어둔 돼지고기가 신경 쓰여 그걸 해결하느라 순대는 그다음으로 미뤘다. 그러다 또 갑자기 집에 생선 선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거 먹느라 미루고, 아버지가 출근하셨다고 또 미루고…. 결국에는 집에 이것저것 먹을 건 있는데 3,000원 뭐하러 쓰나 싶어 아직도 순대를 먹지 못했다.
순대뿐 만이 아니다.
뭐든 사기 전에 기본 2~3일은 망설이는 습관이 생긴지 오래다. 내가 쓰는 그 돈이 내 시간, 내 몸을 써서가 아니라 늙은 부모님의 노쇠한 몸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팔아 얻은 돈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 돈을 꺼내 쓸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우울한 표정과 20년도 더 된 누런 장판 위에서 낡은 이불을 깔고 자는 모습이 떠올라 내 마음이 죄다 쥐어 뜯겼다. 쥐어뜯긴 마음으로는 그 가벼운 카드 한 장도 쉬이 꺼낼 수 없는 것이다.
덕분에 돈은 알뜰하게 쓰는 편에 속하는 이가 됐다.
재테크 책에서는 좋은 습관이라 칭찬 일색이니 나쁠 것도 크게 없다. 습관이 생긴 이유가 밝지 못해 마음이 좀 상해서 그렇지. 하루는 치킨 한 마리를 시킬 때도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 내 모습에 스트레스를 좀 받았다. 그래서 이게 내가 번 돈이었어도 이렇게까지 고민을 했을까 생각해봤다. 내가 직장을 다녀서 월급을 200만 원 정도 벌었다면 이 습관은 생기지 않았을까?
지금 이 카드에 들어있는 돈이
내 돈이라면 나는 쉬이 치킨을 시켰을까…?
순간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지금 이게 내 돈이면… 진짜 내가 번 돈이라면…! 치킨은 무슨 치킨이야, 당장 집 한 채도 없는데!!! 자산 하나라도 더 마련해야 할 판에, 2만 원이 아쉬운 상황에 치킨~? 치~키이이인~?? 나이 한 살 더 먹는 판에 치킨 한 마리를 더 시키겠다고~???
순식간에 지독한 경각심이 들었다.
돈 벌게 되면 예쁜 옷 1벌 사 입어야지 했던 마음도 싹 지워져 버렸다. 당장 3년 뒤에 안정 자금과 노후 자금 마련, 부모님 용돈 등 돈 쓸 곳이 수두룩인데 겨우 옷 하나 더 사겠다며, 치킨 좀 더 먹자며 2만 원을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고 아깝다. 내가 힘든 게 번 돈을 소비하는 건. 불효스럽게도 부모님 돈보다 내 돈 쓰는 게 더 아깝다. 상상일 뿐인데도.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20대 초반에는, 그러니까 어리고 몸이 건강할 때는 겨우 아르바이트만 하면서도 그 비싼 배스킨라빈스 31 아이스크림을 쉬이 사 먹었다. 카페는 자기 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다. 돈 참 쉽게 썼다.
그때는 부모님 돈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별 죄책감이 없었다. 나름 독립적인 성향이 강해서 용돈은 스스로 벌겠다며 20살 되자마자 휴대전화비, 의류, 잡화, 미용, 먹고 노는 것 등 내가 쓰는 돈은 아르바이트비로 해결하고 학원은 나라에서 주는 혜택을 받으며 다녔다. 하지만 가끔 혜택을 받을 수 없는데 배우고 싶은 게 있을 땐 부모님께 손을 벌렸다.
그리고는 한 번에 3개월짜리 요가 수업을 끊고 5번도 안 가고~ 천연비누 만들기 수업을 들을 때도 굳이 전문가 과정 이수하겠다며 비싼 수업료 내놓고 그걸로 돈 한 푼 벌지 못했다. 돈을 그냥 뭉텅이체 버린 셈이다. 근데 그 돈이 아까워서 속이 뒤집히거나 그러지 않았다. 열심히 하지 않는 나 자신에 화가 나긴 했지만…. 그렇게 내가 번 돈은 거의 다 쓰고 가끔 목돈이 필요할 때면 하루도 고민하지 않고 부모님의 돈을 가져다가 썼다.
그래도 불편하거나 불안한 마음이 없었다.
젊음과 건강은 당당함을 가져다주었다. 돈을 그렇게 쉽게 펑펑 써대도, 그래서 문제가 생겨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영 다른 것이다.
조금 가난한 노후에 껴보니 돈을 아낄 수밖에 없다.
50,000원을 더 쓰면 당장 다음 달 카드값에 스트레스를 받고, 부모님이 당장 일하지 않아도 들어와 줘야 하는 생활비는 아직도 적정선에 닿지 않았다. 치킨 한 마리에 노후가 바로 타격을 입고 생활이 당장 힘들어지는 게 바로바로 느껴진다. 그러니 “그냥 질러!”라는 말을 용감하게 실행할 수가 없다. 어려운 현실은 실제 물리적인 힘으로 나를 막아내지 않지만, 500g도 되지 않는 짧은 엄지손가락 하나로 휴대전화 속 ‘결제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아마 부모님의 생활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30대가 된 지금도 그렇게 살았겠지. 아직 나는 젊고 노후는 너무도 멀리 있고 시간은 많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오늘과 같은 하루를 살아갔겠지. 30대를, 그리고 40대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어야 했는데 후회를 하면서. 뻔하다, 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