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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Feb 23. 2022

29_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목차__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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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서 혼자 살아갈 수 없을 때,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할 때 과연 나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런 쓸쓸한 생각을 하다 보면 머릿속에는 곧 요양원이 떠오른다. 슬프다. 넓은 마당에서 자식과 요양사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평화로이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요양원이 제일 먼저, 제일 진하게 떠오르는 것은.


부모님이 60세를 넘기신 후로 지인분들 사이에서 꼭 빠지지 않는 대화 주제가 하나 있다. 바로 ‘80대 넘으신 부모님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부모님에 부모님들(이하. 조부모)은 다들 질병이나 노쇠하신 탓에 더 이상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이는 살아가실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들에 사정은 모두 제각각이라 실로 다양하다. 하지만 해결 방법은 거의 요양원이라는 단어 하나만 남는다.


요양원에 가지 않겠다 발악하는 아무개네 아버지, 어머니가 결국은 요양원에 모셔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피는커녕 말도 섞어 본 적 없는 얼굴에 근심이 낀다. 혹시 그곳에 가기 싫다는 부모를 억지로 그곳에 보내는 짓을 내가 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와 내게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칠십이라는 나이에 내가 그런 일을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주름 깊이 새겨진 얼굴에 어정쩡한 걸음걸이, 느려진 말투, 흐릿해진 기억을 가진 노쇠한 사람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까? 자식은 있을까? 내 몸이 성하다면 자식 신세 질 생각은 없다지만, 내 몸에 성치 않을 때조차 바라지 않아야 하나 모르겠다. 그래도 누군가에 도움은 받아야 할 텐데 그게 누구일지는 실로 궁금하다. 그래도 그럴 때 누가 나를 봐주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였으면 좋겠건만.


어머니는 가끔 흔들림 없는 눈빛을 하고 내 몸이 성치 않아도 자식에게는 신세 지고 싶지 않은 게 부모라고 하신다. 아이가 없는 내 주제에도 그런 마음은 이해가 되는 것은 사랑하는 이가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게 싫다는 마음을 어렴풋이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부모가 뇌졸중이라는 소식에도 오지 않는 자식 이라든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오지 않는 자식 자랑을 하던 할머니를 보면 기분이 더럽다. 그 더러운 기분이 유교사상에서 말하는 효도라는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그르다의 표본이라 그런 모르겠다. 만약, 효에 대한 개념이 좀 다르다면 그렇게 사는 건 불행과 전혀 상관이 없다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내 처지가 그들과 같다면 나는 퍽 슬플 것 같다.


그래도 내 아이가 나를 모시느라 고생하는 건 죽어도 보기 싫기는 한데, 그렇다고 도움이 필요한 나를 외면하는 자식을 보는 것도 무척이나 가슴이 아픈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외면당하는 건 지독하게 슬픈 일 중 하나라. 그렇다면 나는 나이 들어서 혼자 살아갈 수 없을 때,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다.


역시 로봇에 내 미래를 거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요즘은 그 고민은 미래 산업에 기대를 거는 쪽으로 답을 찾는 편이다. 그럼 일단 투자부터 해야겠지!? 간병 로봇, 살림 로봇을 만들어내는 회사가 어딨나~ 주식창을 열고! 나는 그 회사에 내 노후를 걸어보련다...+_+ 떡상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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