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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Mar 04. 2022

34_ 노후가 실감 나지 않을 때에는  ①

목차__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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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가 실감 나지 않을 때는 부모님의 삶을 본다.

혹은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친척 어르신 등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본다. 그러고 나서 나를 들의 삶에 대입한다. 그들이 젊어서 노후 준비를 어떻게 해왔는지 묻기도 하면서.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아서 집에만 있을 때에는 부모님만 바라보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때 가장 놀랐던 건 두 분 모두 하루 대화량이 상당히 적다는 거였다. 누군가와 만나기는커녕 지인과 통화를 하는 일도 거의 없으셨다. 그전에는 같이 살면서도 두 분이 그럭저럭 자주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며 사시는 줄 알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무료하거나 외로움 없이 잘 지내시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본 부모님의 은 몇 년 전부터 보았던 후줄근한 싸구려 티를 입은 모습과 자주 하는 외출이라고는 동네 슈퍼 정도가 다였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작은 웃음소리 하나 없었고, 내가 반찬 투정을 하지 않는 이상은 식탁 위에 맛깔나는 음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루 내내 부모님이 하시는 얘기를 모아 보면 하나 같이 세월이 너무 빨리 간다느니(슬픈 감정), 정치가 엉망이라느니(불만), 회사 일이 어렵다거나 먹고살기 힘들다며 뱉는 깊은 한숨뿐이었다. 행복하다거나 즐겁다는 말을 뜻하는 이야기는 없었고, 전부 외롭다거나 사는 게 허무하다는 이야기였다.


자식과의 관계는 어떤가.

부모님이 아프실 때 곁에서 약 먹었느냐고 물어봐 주는 자식은 나뿐이다. 멀리 사는 아들에게는 쉬이 아프단 말씀을 안 하신다. 내가 없었다면 누구네 엄마들처럼 혼자 앓다가 마셨겠구나 싶다. 내 평생 평소에 부모를 살피고 살갑게 구는 자식을 본 게 다섯 손가락에 꼽는다. 그리고 그 안에 나는 없다. 솔직히 나도 지금 같이 사니까 살뜰한 거 아니겠는가.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볼수록 살만하지 않은 어른들에 이 보이기 시작한다. 부모님은 (건강했을 때의) 나보다 외식도 하시고, 여행도 잘 다니시지 않았다. 일은 보람은커녕 즐겁지 않았고 먹고만 사는 무료한 생활은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두 분의 일상을 자세히 관찰하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내가 60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과 똑같은 삶을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까…?’


대충 보아서는 안 된다.

자세히 보아야 한다.

그래야 보인다.

부모님의 식탁 위가 얼마나 가난한지.


대충 보면 다 쉬어 터진 김치에 썩은 냄새가 나는 듯한 간장, 오래되어 생기를 잃고 질척이는 듯해 보이는 다른 반찬들이 “그래도 밥은 알아서 챙겨 드시니까 됐지, 뭐.” 이렇게 결론이 난다.


나는 오늘 하루 말할 사람이 없어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무료함에 죽은 표정으로 소파에 누워 TV를 보시는 어머니를 보고 “우리 엄마 이 정도면 행복하지 뭐~” 했다. 대충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고로 남의 삶은 대충 보면 비참하고 초라한 것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법이니까.


그러니 노후를 실감하기 위해 타인을 바라볼 때는 자세히 보아야 한다. 관찰 대상의 식탁 위에 반찬이 매일 내 자식에게 줄 만한 것인지, 그들에 대인 관계는 어떤지, 하루 종일 어떤 말을 하는지, 말을 들어줄 사람은 있는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무엇인지, 1시간 정도의 산책은 쉬이 할 정도의 체력은 되는지, 따로 아픈 곳은 없는지, 금전적으로 힘든 부분은 없는지, 혹시 소파에 누워 TV를 보면서 저물어 가는 하루를 보며 무력함이나 슬픔을 느끼지는 않는지.


그리고 난 후 그들의 삶에 나를 대입하면 생각보다 금방 답이 나온다. 60살의 내가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나는 어떨지에 대한 마음이. 노후를 잠시나마 실감하는 순간이다.


한 번은 굽은 허리로 낑낑거리시며 힘겹게 파지를 줍는 할머니를 보면 안쓰러움을 느끼다가 가끔 리어카를 끄는 자리에 할머니가 아닌 나를 떠올려 본다. 또 한 번은 매년 여행을 가시는 은수 아주머니의 모습에 나를 떠올려 다. 전자는 노후에 대한 경각심이 순식간에 일어나후자는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 절로 든다. 이로 인해 노후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내가 어떤 미래를 원하는지 쉬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왕이면 힘들게 사는 분, 잘 사는 분 등 여러 경우에 나를 대입해 보는 게 좋다.


노후를 잘 살고 계신 분, 내가 살고 싶은 노후를 살고 계신 분들이 젊었을 때 어떻게 사셨는지, 노후 준비를 위해 어떤 노력과 준비를 했는지 듣다 보면 지금 나와 그분들에 차이가 뭔지 알 수 있다. 그때는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으니 도움이 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무조건 풍요롭게 잘 사는 중산층에 노인에 자신을 대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현저히 떨어지는 내 능력과 노후 준비 수준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강남에 건물 3개 가진 어르신에 내 미래를 상상하는 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노력해서 갑부가 되리라 하는 목표가 있다면 모르겠다만, 그게 아니라면 일단은 지금 내 삶이 쪼들리는 사람은 쪼들리는 노후를 살아가는 분에 자신을 대입해야 한다.


다행히도 나는 노인이 되려면 30년 정도나 되는 시간이 남은 덕분에 노후의 경각심은 며칠을 가지 못하고 오늘도, 내일도 푼돈을 쉬이 쓰고 게으름을 떠는 날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꽤 자주 이것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고, 오지 않을 수도 있으며, 막상 노후로 가는 길목에 상상치도 못한 횡재로 부~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요절하지 않는 이상 노후는 닥친다는 기정사실과 횡재는 내가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률이 더 크기 때문이다. 작은 확률에 희망을 걸어보긴 하겠지만 거기에 미래를 전부 걸 수는 없다. 큰 확률도 신경 써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꾸 부모님의 하루를 살핀다.

그리고 계속 스스로에게 묻는다.

부모님처럼 살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절대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지.

내가 60대가 됐을 때 부모님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면 어떨지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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