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겨울이다. 물기를 적당히 머금었다 플라워 폼에 제 몸을 꽂은 녀석 한 다발을 사면, 2-3주 정도 길게 꽃을 볼 수 있는 계절. 화병의 물을 갈아주며, 녀석들의 줄기 끝을 사선으로 잘라주는 순간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꽤 여러 다발의 녀석들을 눈으로 보듬고 손으로 만졌었다. 여름엔 금세 시드는 꽃들을 위해 화병에 얼음을 토도독 흘려 넣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니.
사실 어렸을 때엔 꽃다발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꽃다발'을 단순히 금전적으로 비싼 선물, 비싼 취향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나 싶다. 금세 시들어 버릴 걸 뭐하러?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다 보면 꽃이란 건 참 예쁘고도 처연한 무엇이었다. 피었을 때야 예쁘지만 질 때의 쓸쓸함까지 전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싶었고, 꽃을 매만져 다발로 내놓으시는 누군가의 수고를 고려할 정도로 성숙하지도 않았다. 그때의 나는.
예쁘지만 비싸고, 아름답지만 슬프고.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꽃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새 집에 이사오던 2년 전 정말 별안간, 느닷없이. 격주로 배달되는 꽃다발을 받아보게 되었다. 새로 시작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묵묵히 많은 것들을 해내던 겨울이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것들을 준비하면서 설레기도 했지만 그만큼 또 많이 건조했었다. 그런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면 그건 아름다운 것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선물이었으면 했고, 그렇게 선택한 것이 바로 작은 꽃다발이었다. 라넌큘러스가 섞인 작은 다발을 시작으로 격주에 한 번씩, 계절을 함께 흐르며 그 계절에 어울리는 언어들을 눈에 익히는 기분으로 받아왔다. 꽃이 온다는 연락이 오면 그날은 아침부터 슬몃,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건 꽤나 작고도 신선한 변화였다. 별 것 아닌 꽃 뭉치 하나가 하루의 기분을 결정해주는 느낌이 들어 묘한 기분도 들었으므로, 상자 안에 소담스레 든 작은 꽃다발을 꺼내어 줄기를 찬 물에 씻고, 줄기를 사선으로 잘라 신선한 물이 가득 든 유리 화병에 녀석들을 꽃아 두고는 사진을 한 장씩 찍곤 했었다.
레드베리, 나탈리아 카네이션, 세이지, 거베라, 알스트로메리아, 수수, 트로피카 장미, 남천, 샐비어, 맨드라미, 리시안셔스, 백일홍, 생강초, 시네 신스, 설유화, 아스틸베, 시넨시스, 해바라기, 소국, 라넌큘러스, 프리지어, 작약. 알면서도 모르던 꽃의 이름들을 어느 날은 가만히 읊어보기도 했다. 일을 쉬는 기간 동안 목가적이지 말지어다, 하고 스스로에게 되뇌곤 했지만 현실감각이 아득해질 만큼 그건 꽤나 목가적인 감각이었다. 꽃이 시드는 것은 줄기를 타고 물의 세균이 옮겨 붙기 때문이라 했는데 물 때가 끼는, 꽃을 꽂은 지 일주일째 되어 가는 마냥 깨끗하지 않은 화병에 꽂힌 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쓸쓸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느낌이 들곤 했다.
언젠가부터는 시드는 꽃을 빛과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어 , 때로는 높은 곳에 잘 널어 말려두는 일도 있었다. 곰팡이가 피지 않고 바싹, 잘 마른 꽃은 핸드 타이로 묶어 부케를 만들었다.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고 또 그렇게 가끔을 보곤 했다. 시드는 일이 마냥 쓸쓸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마냥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라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색깔들을 보게 되면 너는 이 색이려고 태어났겠구나, 하는 바보 같은 생각도 들곤 했었겠지.
처음으로 받았던 꽃다발에 숨어 있던 '라넌큘러스'가 이번 꽃다발에도 슬몃 숨어있는 것을 보며 나는 슬쩍 예전 생각이 났다. 예쁘긴 하지만 비싸고, 슬프잖아. 얘기했던 이전의 내가. 선 자리에서 툭 툭 떨어져 내리는 꽃잎을 정리해 잠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는 이번에도 잘 피고 지었구나,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된다. 이제는 핀 순간이 짧아도, 지는 순간까지가 전부 의미라는 걸 알 것도 같다. 하기사, 사람도 그렇지. 활짝 피었다가 지는, 생을 마감하는 모든 순간들이 의미 있는 것이겠지.
올려둔 화병에서 그러기로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활짝 피었다가, 또 져가는 꽃들에게서 자연스러움을 배운다. 그 무엇 하나 의미 없는 건 없다고 온 몸으로 말하는 꽃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기분으로,
우습지만 조금은 경건한 마음으로
오늘도 꽃병을 새 물에 헹구고, 깨끗한 물을 가득.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