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도 Aug 20. 2021

멈춤

나는 걸음이 상당히 빠르다. 보폭도 넓은 편이고, 목적지가 가까우면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진다. 누군가와 함께 걸으면 내 걸음이 빠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옆에 선 사람이 조금 천천히 걷자는 눈으로 날 쳐다보면 그제야 조금 느릿하게 보폭을 늦추곤 했다. 그렇게 걷는 게 일상이었다. 잠시 신호등 앞에 멈추거나, 어딘가에 머물 때를 제외하고 내 발의 근육은 계속 걷기 위해 다음 걸음을 세고 있었다. 성격이 딱히 급한 편도 아닌데 걸을 땐 늘 그랬던 듯싶다.


스무 살 때였을까, 처음으로 갖고 싶은 디지털카메라가 생겼다. 두어 달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 돈을 깨서 망설이지도 않고 그 카메라를 샀다. 목에 걸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무게로, 200만 화소의 렌즈가 회전되는 형태의 모델이었다. 밤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생각하면 꽤나 열악한 스펙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기꺼이 지니고 다니는 시간에 슬며시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 달쯤 되었을까, 나는 카메라의 회전 렌즈를 돌려 열 때마다 내 걸음이 느릿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아챘다. 사진을 찍으려면 길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걸음이 느려지며, 결국 멈춘다. 찍고 싶은 대상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추는 것이었다.' 그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오후를 아직도 기억한다. 내 보폭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사실 굉장한 발견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목적지까지 바지런히 빠르게 걷는 것밖에는 몰랐으므로. 찍고 싶은 것을 살피며 길을 걷는다는 것. 그 대단한 행위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빠른 내 걸음을 잡아채고 셔터를 누를 때에는 딱 그만큼의 숨을 참게, 멈추게 만드는. 내 목에 걸린 작은 카메라.


그때의 나는 내가 먹고사니즘을 위해 한 때 사진을 선택할 걸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모르지 않았을까 싶다.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의 시옷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사실 제대로 멈추는 데에는 기계식 카메라만 한 것이 없었다. 적정한 노출인지 아닌지 알려주는 노출계가 불빛으로 무언가를 표시해주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내 손으로 맞추어야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필름의 감도를 다이얼을 돌려 맞추고, 셔터스피드를 설정한 후 조리개를 열거나 닫고 카메라를 눈에 대고 적당히 프레이밍을 한 후, 초점 링을 돌려 찰칵. 한 장을 담는다. 기계식은 이 모든 작업을 멈춘 상태로 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더 매력적이다. 모든 과정을 느릿하게, 조금 여유를 가지고

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물론, 다이얼링을 하다가 순간을 놓쳐버리는 순간들도 있지만.


이제 나는 천천히 걷고 싶을 때마다 조금 고집스럽게 카메라를 준비한다. 최근에는 1회용 카메라의 매력에 빠졌다. 가볍고 쉽게 손에 잡을 수 있고, 단순한 목측만으로 장면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담는 것에도 익숙해졌지만, 무언가 한 번 더 손이 가는 조작이 까다로운 카메라가 더 좋은 건, 걸음이 느려지고, 결국은 멈추게 되는 그 순간들을 조금 더 오래 즐기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귀에 걸고 기꺼이 걸음을 멈추는 시간. 따뜻하고, 흐붓하다.



 

이전 10화 마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