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남는 선물.
어느 환절기 저녁,
정확히는 저녁이라기보다 밤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가을밤.
그녀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마음 한 병을 돌려받았다.
이런 타이밍엔 뭐하지만, 선물이 있어요.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으며
반쯤 식은 유자차를 1/3 정도 홀짝이고 있을 때 그녀가 쇼핑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얹는 것을 보았다.
세상에.
그건 바로, 3월 말에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내 결혼식 부케 꽃송이의 일부가 들어있는 유리병이었다.
알알이 하얗고 뽀얗던 것이, 그때의 모양보다 조금 더 활짝 핀 채로 야무지게 말라 있었다.
유리병 안의 큰 꽃송이가 그때의 그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줍은 목소리가 잠시 공간 위에 쉼표를 찍듯 조금 느릿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적당한 밀도로 울려 퍼지는 동안 나는 유리병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빈 틈을 잘 둘러싸고 있는 화려한 잎들은 본래 말려두었던 기억들을 함께 넣은 흔적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이른 봄. 결혼식에서 내가 들었던 부케에는 알록하거나 달록한 색이 없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하얀 장미들만 소담스럽게 한 묶음으로 구성된 단조로운 부케였었지,
드레스에 다소 반짝거리는 비즈들이 많아 화려했기에 최대한 단순하고 심플한 것이 좋겠다는 플래너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결혼식 직전에 보내온 사진엔 싱싱한 흰색 장미들이 선연했는데 막상 당일날 받아보았더니 너무 지나치게 밋밋하고 소담스러워서 부케를 받기로 되어 있던 그녀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것도 기억났다.
그러고 나서 사실, 나는 그 꽃들에 대해 당분간. 아주 오래도록 잊고 지냈다.
꽃을 받아주고 좋은 기억이었다고 예쁘게 웃으며 말해줬던 그녀가, '그 꽃 예쁘게 말리고 있어요.' 하고 이야기를 한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절을 넘어, 마음을 돌려받은 밤.
나는 그날 밤. 돌아오는 길에 내가 잊고 있었던. 그렇지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어느 날의 기억이 이렇게 선연하게 마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 에게 이렇게 빛나는 무언가를 남겨주는 모양이다.
마음에 드는 유리병을 찾지 못해 조금 헤맸다는 그녀의 선하고 다정한 마음이 괜스레 고마워 코끝이 찡해지더라.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던 마른 꽃잎을 적당히 담은 병에, 그날 부케를 타이 했던 하얀색 리본이 조금은 서툴고 귀엽게 묶여 있었다.
돌아와서 유리병을 잘 보이는 곳에 세워두는 것으로 떠올렸던 그날의 무언가를 갈무리했다.
영원한 기억이란 건 없다지만, 그 자리에 유리병 속 꽃잎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선물을 준비한 사람의 마음을 상상해보고, 그날 정신없이 보내버린 내 결혼식의 어느 자락을 기억해보고, 이렇게 값지게 돌아온 선연하고 다정한 마음에 대해 오래오래 기억하게 되겠지.
무언가를 진득하게 고민해서 선물하는 일에 간혹 심취하는 내가 배우고 싶었던 밤의 한편.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을 돌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삼스럽지만,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돌려줄 수 있다면 참으로 다정하겠다. 생각했다.
어쩌면 흔하고, 작고, 다정해서 반짝이는 밤.
그래서 참
감사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