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좋을 때.
손 윗사람에게 시기마다 듣는 일종의 말 중. 가장 자주 듣지만 늘 이해할 수 없었던 말.
어린 나는, 머리가 커 어른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을 때부터 이 문장을 안부인사처럼 맞닥뜨리며 지냈다.
중학교 때는, 공부 잘하는 윗 층 아이와 같은 학교에서 늘 비교당하는 것이 지겨웠고
고등학교 때는, 굵은 종아리 때문에 교복 치마에 다리를 드러내는 것이 늘 싫었으며
학교 끝나면 익숙하게 학원 차를 타고 의미도 없어 보이는 동네를 순회하는 것이 하루의 마지막이라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었다.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었고, 특출 나게 눈에 띄는 학창 시절을 보내지도 않았거니와
소극적이어서 빌려준 펜 하나를 돌려받지 못하는 성격의 나에게 늘 '너 참 좋을 때다.' 이야기하는 어른들의 목소리는 윗사람이 보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되는 부분이긴 했지만 늘 조금은 얄미운 안부인사였다.
앞머리를 커튼처럼 드리우고 다니던 그때의 내가 느끼던 입시지옥은
모 아니면 도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인생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뿐이었고
한국의 입시 커리큘럼에 진저리 치던 나는 '한국에서는 창의적으로 무언가를 펼쳐놓기가 힘들어.' 하고 한창 볼멘소리를 늘어놓던 감수성 예민하던 시기였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도 나는 '너 참 좋을 때다.' 란 소리를 들으며 지냈다. 스물한 살 때도, 스물두 살 때도 그랬다. 수강신청 때문에 쩔쩔매던 내게 가까운 어른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원하는 과목을 학점 맞춰 들으면서 여유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니. 너 참 좋겠다.' 고. 새로고침을 해 가며 상기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온도차의 말이었다. 여유 시간을 내 과외 알바를 하면서도 그때들은 나에게 있어 그다지 '좋은 때'는 아니었다 느꼈으니까.
스물다섯에도, 여섯에도. 손 윗사람의 그 안부인 사는 익숙한 듯 계속되었다. 직업을 구한 이후에도 '너 참 좋은 때네'라는 말들을 맞닥뜨릴 줄은 몰랐던 내게 그때의 그 말들은 참 애매하게도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대체 나의 좋은 때. 는 언제 있단 말인가.
지나 보니 좋았더라. 싶은 거.
얼마 전인가, 아는 동생이 내게 볼멘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언니, 어른들이 자꾸 나한테 좋은 때, 좋은 때 하시는데 나는 이제 그 말 좀 그만 들었으면 좋겠어. 좋긴 뭐가 좋아? 이쪽도 나름 사정이 있는데.'
곧 20대 중반에 접어드는 아는 동생은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학벌도 좋아 인기가 많다고 했다. 졸업 후 대기업 위주로만 입사지원을 하고 있고, 아직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몇 달 전 동생에게 '네가 끈기 있게 잘 하고 있으니까 언제든 잘 될 거야.'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넨 적도 있었지. 적당히 부루퉁한 목소리로 그 질문을 하는 동생이 새삼 귀여워 보여 심각한 질문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빙긋 웃음이 날 뻔해서 표정을 고쳤던 기억이 난다. 그래, 공감하는 말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나도 그때의 동생이 좋아 보이고, 조금은 부럽더라. ‘나도 참 많이 듣던 말인데, 막상 이해 잘 안 되지? 그런데 지금도 종종 들어.’ 하고 웃었지만 구태여 다음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게 사실, 그냥 지나 보니 좋았더라. 싶은 거 아닌가 싶어.'
그때의 나는 내가 다시 스물다섯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를 상상해보고 있었다.
조금 더 높은 이상을 가졌을 것이고, 조금 더 똑똑하게 생각해서 행동했겠지.
이미 익숙하게 굳어져버린 무언가를 그때라면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몰라.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래 사실 그때.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던들. 치열하게 고민했던들. 무엇을 시작하기에 참 좋은 시기였구나. 다른 길을 가볼 수 있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 보고 싶다. 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읽는 느낌으로.
나보다 어린 사람을 보고 '좋을 때'라고 느낄 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 사람이 내가 이미 지나온 그 어느 지점에서 서 있는 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닐까. 나 거기 지나왔는데 지금 보니 거기 서 있을 때. 참 좋았던 것 같아.
그래도
그땐 참 좋았지.
아니, 지금도 좋지 않아?
해를 거듭할수록 '그땐 좋았지' 하는 추억을 하나 둘, 쌓아가다 보며 생각하니 그래. 어쩌면 그때는 그때 좋았던 나날들이 있었다. 보기 좋게 시간을 흐르며 미화되는 기억의 습성을 떠올린다. 일요일, 독서실에 갈 계획을 짰는데 늦잠을 자버려 결국 하루를 땡땡이치고 친구와 종일 동네를 헤집으며 돌아다녔던 기억. 수업시간 선생님 몰래 주고받았던 쪽지, 밤을 새 과제를 하고 친구 집에서 마셨던 맥주의 온도. 주말마다 가게 됐던 동서울 터미널. 그 구석의 어느 국숫집.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기억들이 떠오르면 '그 때여서 할 수 있었던' 것들도 함께 따라 나온다. 이제는 더 이상 펼칠 필요가 없는 문제집. 다시 사용할 일 없는 빨간 색연필. 박제된 어느 구석의 지금보다 어린 내 얼굴. 보기 좋게 따뜻해진 그 기억들을 늘어놓으며 그땐 참 좋았지, 중얼거리지 않더라도 언젠가. 가 제법 그럴싸한 언젠가.로 완성된다. 사실 '좋을 때' 라는건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쳐가고 있는 시간들을 통칭하는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지나 본 사람만이 그 길에 서 있었을 때 본인이 얼마나 더 많은 선택지를 갖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된 것들. 그리고 지금 알고 있다 여기지만 아직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좋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금을 산다. 생산활동을 위해 알람을 맞추고. 시간에 맞춰 무언가를 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위해 계획을 짠다. 그 가운데에도 가끔 웃을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일어나고, 사소하게도 맑은 날씨에 치유받거나 좋은 사람과 맛있는 걸 먹으며 기분이 따뜻해지기도 한다. 구태여 말로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해도, 지금 이 순간들이 지나면 언젠가 , 그러니까 먼 시간이 또 흐른 후. ' 그때는 이래서 좋았지.' 하고 떠올릴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니 좋을 때는 딱히 정해져 있는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
오늘의 어느 부분도 좋은 때.
그때와 때들이 모여, 우리를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건지도.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가장 좋은 때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몇년 후, 어떤 날 가만히 서서 '좋았다. 그때.' 중얼거릴 날이 오겠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있더라도 그 때 지금 내가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로도 괜찮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든다.
가을. 참 좋을 때다.
좋은 계절, 금세 지나가 아쉽다는 생각이야 해서 뭐해.
작년 가을만큼 올해 가을도 좋고
짧다.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