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야의 정원(4)

by 순진한 앨리스

오늘도 병원 문이 열렸다. 루야의 깃털은 조용히 환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작은 치유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건 매일 반복되지만, 매일 조금씩 다른 기적이었다.

오늘은 그녀가 병원을 내원하는 날이다. 윤하린. 20대 후반의 프리랜서 콘텐츠 디자이너. 지금은 휴직 중이고 병원의 분위기 메이커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녀는 늘 그렇듯 요란스럽게 병원으로 들어섰다. 밝은 노란색 블라우스,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반짝이는 H라인 치마, 직접 만든 귀걸이와 팔찌, 목걸이가 빛을 반사하며 그녀를 감쌌다. 그 화려함은 그녀의 활발한 인상을 더해 주었지만, 눈웃음 뒤의 눈동자엔 자주 멍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린은 웃으며 인사했다. 말투는 경쾌했고, 그 뒤를 이어 봉투를 내밀었다.

“출출하시죠? 이거 한 번 드셔 보세요. 병원 앞 사거리에 빵집이 새로 생겼는데 빵이 참 맛있더라고요.”

연서는 부드럽게 웃으며 받았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을게요. 접수해 드릴게요.”

하린은 겉으로 보기엔 정신과 병원과 어울리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연서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엔 깊은 우울감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는 걸.

문득, 연서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정이를 떠올랐다. 활발하고 수다스럽고 짓궂은 친구 다정이. 그녀도 그 내면에 슬픔을 간직하고 있을까?

다정이와 만날 때면 늘 연서의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곤 했다. 그녀의 웃음 장난 스런 말투, 예상치 못한 따뜻한 행동들. 그 모든 것이 내 고요한 마음에 작은 빛을 흘려주었다. 연서는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단 한 번도 다정이의 마음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웃을 때, 그 웃음 뒤에 어떤 감정이 있었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활발하게 말을 이어갈 때, 그 속에 숨겨진 고요함이나 슬픔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서는 그녀의 따뜻함에 기대기만 했고,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날, 연서는 조용히 노트에 적었다.

“다정아, 너의 마음은 어떤 색이었을까. 나는 이제, 그걸 물어볼 준비가 된 거 같아.”

그리고 다정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

“내일 볼까?”

늘 그렇듯 다정이는 유쾌하게 “오케이”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유리병 속의 깃털을 정리하다가 하린이 남긴 깃털 하나를 발견했다. 노란색으로 접힌 깃털 끝엔 희미한 회색빛이 번져있었다. 그건 하린의 감정이 조용히 스며든 흔적이었다. 깃털 끝에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도 웃었어요. 그게 나를 지켜 주는 방법이니까요.”

연서는 그 문장을 읽고 조용히 숨을 고르며 깃털을 유리병에 넣었다.

그 순간, 루야가 날아와 깃털 위에 앉았다. 깃털 끝에 분홍빛이 아주 살짝 스며들었다. 그건 위로의 색이었다. 누군가의 감정이 조용히 받아들여졌다는 증거였다. 연서는 속으로 속삭였다.

“하린 씨도, 다정이도… 그 밝음 속에 슬픔이 있다는 걸 나는 알아요. 그리고 그 슬픔도 예쁘게 피어날 수 있다는 걸 믿어요.”

늦은 오후, 병원 옆 작은 공원에 가을 하늘의 쌀쌀함이 감돌았다.

연서와 다정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손엔 따뜻한 국화차가 들려 있었고, 그 옆엔 고목나무가 조용히 서 있었고, 그위 루야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정이는 오늘도 밝았다. 분홍색 머리핀을 꽂고, 장난스러운 말투로 연서를 웃게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연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정아… 너는 늘 밝고 활발해서 내가 많이 기대게 했어.”

다정은 웃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서 너는 조용하니깐 내가 옆에서 좀 시끄러워야지. 에너지 충전!” 하고 손짓으로 기를 불어넣는 장난을 했다. 연서는 그런 다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근데 너한테 이런 말 해도 될까 싶었는데... 가끔은 너도 많이 힘든 건 아닐까 생각했어.”

다정은 말없이 연서를 바라보았고, 연서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 병원에 하린 씨라고 20대 환자가 있어. 그분도 너처럼 밝고 활력이 넘치더라고. 근데 그 내면에 우울이 자리하고 있더라구. 그래서 내가 볼 땐 억지로 활기찬 척하는 느낌이 들어서 안쓰러웠어. 그때 갑자기 다정이 네 생각이 나더 라고. 너 두 혹시, 내면에 우울을 감추고 사는 걸 아닐까 하고 궁금해졌어.”

다정이는 놀란 듯 조금 떨린 눈을 하고 국화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난 아직 괜찮아. 가끔은 우울할 때도 있지. 어디 좋은 일만 있겠어. 근데 그걸 표현하고 말하면 내가 한없이 무너질까 봐… 그게 무서워. 차라리 밝은 척하는 게 맘이 편해. 그래서 연서 네가 그리 느낄 수도 있을 거야.”

다정은 국화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정을 바라보며 연서가 조용히 말을 했다.

“ 다행이네. 걱정했었거든. 근데 다정아. 나는 데가 어떤 모습이든 그냥 다 다정이라고 느껴. 밝은 것도, 조용한 것도, 슬픔도… 그게 너니까.”

다정이는 씩 웃으면서 연서를 바라보았다.

연서는 조심스럽게 루야가 남긴 깃털을 하나 꺼냈다.

그 깃털 끝에 연서의 손끝이 닿자 분홍빛이 아주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건 연서의 감정이었다. 말하지 못했던 마음, 조용히 품고 있던 따뜻함. 그녀는 작은 펜으로 짧은 문장을 적었다.

“너의 곁에 있을 때,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같아.” 그리고 그 깃털을 다정이에게 깃털을 건넸다. 다정이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이건…?”

연서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건 감정을 먹는 새 루야의 깃털이야 분홍색은 사랑이고. 이건 내 마음이야. 말로는 잘 못하겠어서… 깃털에 담았어.”

“고마워, 연서야 이런 마음 처음 받아봐.”

루야는 고목나무 위에 앉아 조용히 앉아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그 날갯짓은 두 사람의 감정을 조용히 축복하는 듯했다.

며칠이 흐른 뒤 연서는 여느 때처럼 똑같이 이른 아침 병원에 도착했다. 커피 한 잔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예약 장부를 펼치며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밖엔 가을 햇살이 조금씩 병원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고, 커피의 따뜻한 향이 조용히 공간을 채웠다.

연서는 장부를 넘기다 오늘의 이름 두 개에 자연스레 시선이 멈췄다.

하진, 하린. 요즘 들어 그녀가 가장 자주 마음을 쓰게 되는 두 사람이었다.

연서는 피식 웃었다. “꼭 남매 이름 같네…”

하진. 조용하지만 깊은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 깃털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꺼내 보이기 시작한 사람.

하린. 화려하고 밝지만, 그 속에 조용한 그림자를 품고 있는 사람.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 연서의 마음속에선 어딘가 닮은 결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유리병 속 깃털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또 어떤 감정이 이 병원에 머물다 갈까. 그리고 그 감정들이 어떤 색으로 피어날까. 연서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건 매일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매일 조금씩 다른 마음이 피어나는 작은 기적의 시작이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조용히 젖어가고 있었고, 병원 안에도 그 빗소리처럼 고요함이 번지고 있었다.

그때, 하린이 병원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섰다.

오늘의 그녀는 평소의 화려함과는 달랐다. 무채색 니트에 청바지, 묶지 않은 머리, 손목 팔찌도, 목걸이도, 걸이도 없었다.

그녀는 접수대 앞에 서서 작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연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접수를 했다.

가을에 내리는 이 비처럼, 오늘의 하린은 조용히 우울했다.

병원의 분위기 메이커. 늘 밝은 척 애쓰던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여 연서는 늘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 왔지만 막상 이렇게 우울한 하린을 마주하니 그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하린의 침묵과 우울함은 병원 전체의 공기를 조용히 무겁게 만들었다.

진료를 마친 뒤, 하린은 말없이 접수대 앞에 다시 섰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맑아졌지만, 여전히 조용한 그림자를 품고 있었다.

연서는 조심스럽게 색종이 몇 장을 꺼내 하린 앞에 내밀었다.

“오늘은… 마음에 닿는 색이 있으면 하나 골라보세요. 전에는 밝은 노란색이었어요”

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연한 회색빛이 감도는 종이를 골랐다.

그녀는 천천히 깃털을 접었다. 그 손끝은 평소의 화려함과 달리 조용하고 단정했다. 깃털을 다 접은 뒤, 하린은 작은 펜으로 짧은 문장을 적었다.

“오늘은 구슬픈 가을비 같이 내 마음도 슬프네요. 근데 비가 그치듯 내 마음의 우울도 언젠가는 그치겠죠. 그때 밝은 나로 돌아올 거예요.”

연서는 그 깃털을 받아 들며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하린이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꺼내 보인 순간이었다.

그 깃털 끝엔 희미한 회색빛이 번져 있었고, 그 위로 루야가 조용히 날아와 앉았다. 그 순간, 깃털 끝에 분홍빛이 아주 살짝 스며들었다. 그건 위로의 색이었다. 누군가의 감정이 조용히 받아들여졌다는 증거였다.

연서는 속으로 속삭였다.

“하린 씨, 오늘의 비처럼 우울함의 조용함도 당신을 지켜 주는 힘이에요.

그리고 그 마음은, 이 깃털 위에서 예쁘게 피어나고 있어요.”

그날 오전, 병원 안엔 조용한 빗소리와 함께 작은 위로가 피어났다.

루야는 깃털 위에서 잠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건 감정이 조용히 안겨진 순간이었다.

가을비가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던 오후, 병원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이번엔 하진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말없이 들어섰지만, 그 발걸음엔 조금 더 단단한 결이 느껴졌다.

연서는 접수대 너머에서 하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옷차림은 늘 그렇듯 단정했지만, 오늘은 작은 변화가 있었다.

손에 들린 작은 종이봉투. 그건 하진이 자신의 감정을 담아 오는 방식이었다.

“안녕하세요.” 하진은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연서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깃털 하나 접으실래요?”

하진은 잠시 웃으며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네. 오늘은… 조금 더 가벼운 색을 골라봤어요.” 연서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 안엔 연한 초록빛이 감도는 깃털 하나와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마음이 더 차분해졌어요. 연서 샘 덕분이에요.”

연서는 그 문장을 읽고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하진이 자신의 회복을 조용히 인정하고 있는 증거였다.

그 깃털 끝엔 초록빛이 번져 있었고, 그 위로 루야가 조용히 날아와 앉았다.

깃털 끝에 분홍빛이 아주 살짝 스며들었다. 그건 감정이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증거였다. 연서는 속으로 속삭였다.

“하진 씨, 당신의 회복은 조용히 피어나고 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은, 이 깃털 위에서 예쁘게 자라고 있어요. 루야 고마워 계속 하진 씨를 지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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