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라 쓰고 도망이라 읽는다

불안한 회피이자 그럴듯한 도망이었다

by 아말

드디어 장장 21일간의 도하에서의 모든 격리가 끝났다. 유급휴가를 사용해 잠시 비행을 쉬기로 하고 도하를 떠나 한국으로 나가는 엑싯퍼밋을 신청했다. 휴무 스케줄을 받는 즉시 나갈 수 있다.

2020년 4월 2일.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하마드 공항으로 향했다. 격리 전 마지막 행선지와 격리 후 첫 행선지 모두 이 하마드 공항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공항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늘 붐비던 하마드 공항은 텅텅 비었고, 나를 포함해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몇몇의 외국인 노동자들 뿐이었다. 탑승구까지 걸어가는 길이 근래 들어 가장 많이 걷는 거라 기분이 이상했다.


승무원이 승객으로 비행기를 타는 기분은 늘 묘하다. 너무도 익숙한 환경에 앉아서 서비스를 받는 입장이 되는 것은 짜릿하다. 하지만 이 날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런 기분을 느낄 새가 없다고 하는 게 맞겠다. 지금 이 엄청난 결정이 과연 괜찮을지, 오늘 비행기 안에 코로나 확진자는 없을지, 이렇게라도 나갈 수 있어서 다행인 건지, 언제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셀 수 없는 걱정과 생각이 뇌를 지배했다.


인천 비행은 장거리라 담요, 이어폰 등 모든 어메니티와 아침, 저녁 두 번의 식사가 제공되지만 코로나 시국인 만큼 많은 서비스가 생략되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이 비행기에 타고 카타르를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했다(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다행히 아는 크루들이 있었고 그들은 마스크만 착용하고 탑승한 나에게 장갑과 담요 등을 챙겨주었다. 그렇게 약 9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직원이 비행기를 탈 때는 복장에 제한이 있다. 운동화나 캐주얼한 복장은 안되기 때문에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찾고 운동화부터 꺼내 갈아 신었다. 한국에 입국한 승객들을 추적하기 위한 엄청난 조사들을 거친 후 나를 픽업하기 위해 공항으로 오시는 아빠를 기다렸다. 당시에는 대중교통이 제한된 상태라 모든 사람들은 배정받은 버스나 개인 픽업으로만 이동을 해야 했다. 그렇게 아빠를 만났고 오만가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나를 걱정하는 아빠와 나란히 마스크를 쓰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빠는 엄마가 챙겨주신 여러 소독 용품들을 나에게, 그리고 내 짐들에게 뿌려댔다. 그리고는 차에 짐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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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모님 댁 강원도 인제에 도착했다. 날은 저물었다. 부모님 댁은 작은 펜션이라 한국에서의 격리는 걱정이 없었다. 갑작스레 바뀌어버린 모든 상황을 서둘러 받아들여야 했다. 나를 언제나 그들의 어린 딸로 맞이해 주시는 부모님을 보며 '이렇게라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국행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가 카타르에서 격리하는 동안 떠돌던 소문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마스크 착용을 허용하지 않았던 회사 때문이기도 했고, 그 와중에 여러 크루들이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 아프거나 죽어간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혹여나 내가 비행을 하며, 또는 숙소를 같이 쓰는 동료 크루가 코로나에라도 걸리면 당시에는 치료법이 없던 상태라 가족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였었다. 아마도 혼자 격리를 너무 오래 한 탓일 거다. 그리고 지금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내 성향도 많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격리 시작부터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제정신이었던 날이 없는 것 같다. 불안함과 불안정함에 머리부터 터져 온몸에 용암이 흘러 녹아내릴 것만 같았고 차라리 그러고 싶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오락가락했지만 지금 이 순간, 부모님 얼굴을 보는 순간만큼은 모든 게 평화로워졌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너무도 평화로웠다. 그리고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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