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며 살아내기

사라지기 두려웠고 두려워서 사라지고 싶었다

by 아말

코 끝에 선선한 바람이 스치기 시작할 무렵,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즈음 마지막 격리를 함께 했던 한국인 동료의 퇴사 소식을 들었다. 정확히는 'redundancy', 정리해고였다. 충격이었다. 그리고 지금 카타르가 아닌 한국에 있는 나도 안전하지 못할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사라짐.

단어가 주는 공포와 불안, 동시에 이 불안감 속에서 정말로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K장녀로 자라서일까, 아님 내 성격일까, 남에게 약한 소리나 힘든 소리를 안 하는 편이다. 상대가 부모라면 더더욱. 내가 원하던 것을 하나씩 이루어 내는 모습을 자랑스러워하시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과거에 느꼈던 나의 성취감들도 스쳐 지나갔다.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처음이었다. 엄마에게 힘들다고 말했다. 그토록 보이기 싫은 눈물도 보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엄마, 나 그만 살아도 좋을 것 같아. 충분히 좋은 삶을 살았잖아. 앞으로 더 견뎌내기가 싫어..."


지나온 시간의 아쉬움보다 마주해야 할 시간들이 두려웠다.

엄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니, 어떤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을까.

지금에서야 자기 연민이나 한탄, 힘들다며 징징대는 소리 정도로 넘기겠지만 그때를 회상하면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던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실제 사라지기로 마음먹은 이들의 뉴스 기사들을 보며 그들의 심정에 더욱 이입했고 나 또한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지금 방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있는 나를, 내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은 애초에 계획한 적이 없었고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적지 않은 나이에 계획 없이 이러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못나 꼴 보기가 싫었다. 이런 오점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흔적도 없이, 먼지처럼, 고통도, 두려움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역시나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회사에서 메일이 한 통 왔다.


'10월 18일. 계약 종료로 인해 전화를 할 예정이다.'


나는 통화가 가능하다고 회신했다. 예정된 10월 18일이 되었고 카타르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무슨 대화를 나누게 될지 알고 기다린 전화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괜찮았다. 하지만 통화를 끝내니 마음이 이상했다. 그 전화 한 통으로 나를 형용하던 정체성과 내 인생의 메인 챕터가 종료되었다.


그리고 나는 사라지지 못했다. 그래서 살아내야 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뭐라도 해야 했다. 이 암흑 같은 생각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오히려 종지부를 찍어준 전화를 받으니 다시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표를 확실히 찍으니 오히려 다음 문장을 이어나갈 기력이 조금씩 생겨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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