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이곳에 다시 뿌리를 내려야 했다
4월에 한국에 들어와 10월에 국제전화로 해고통보를 받기 전까지 딱 6개월이 걸렸다.
머릿속에는 끝이라는 순간에 다다르기까지의 6개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하루 5킬로씩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 밥을 이렇게 오랫동안 먹었던 게 언젠지,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을 한 지가 언젠지 모를 정도로 건강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내 몸은 그에 대해 감사할 줄 몰랐다. 생전 한 번도 트러블이 없던 피부에 피부염이 생겼다. 결국 주사피부염 진단을 받았고 지금도 몸이 조금 안 좋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올라오는 만성이 되었다. 아파서 찾아간 병원에서는 이명, 이석증, 갑상선 항진증 등 다양한 병명을 진단받았다.
서울에 볼일이 있으면 백팩이나 작은 캐리어를 끌고 에어비앤비에서 묵었다.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는 버스 안에서는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한없이 우울했다. 결혼한 여동생 집에도 몇 번 묵었지만 눈치가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동생은 나에게 일도 많고 출퇴근도 불규칙한 제부가 불편해할 것 같다고 미안해하며 말했다. 여동생 집에 묵는 걸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하던 그 당시 동생의 그 말에 나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내가 왜 가족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지.'
미안하다는 말조차 제대로 못 한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아니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부모님 댁에 놀러 온 사촌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회사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가 물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예상했던 일이잖아. 시원섭섭해."
지금 생각해 보면 전화를 받는 순간에 혼자가 아니라 참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든 한국에서 살아나가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침착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외국 항공사 취업을 준비하며 영어강사로도 일을 했기 때문에 영어를 가르치는 건 당장에라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승무원 수업과 영어 면접 수업을 할 수 있는 강남의 메이저 승무원 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와 우선 집을 구할 때까지 에어비앤비 장기 투숙을 결제했다. 올라올 때 엄마는 내가 먹을 반찬을 한사코 싸주셨다. 방에 들어와 짐이랄 것도 없는 옷 몇 가지와 화장품을 풀었다. 옆 방에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 부자가 함께 묵었는데 그땐 감히 딱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코로나 녀석은 도무지 잠잠해질 기미가 없었다. 승무원 학원 수업은 줄다 못해 거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쯤 여동생이 운영하는 필라테스 센터에서 운동하며 동생의 도움으로 다시 필라테스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에어아시아에서 카타르항공으로 이직하기 전, 한국에 머물 때 동생의 영향으로 필라테스 지도자 교육을 받고 자격증도 취득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체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어렸을 때 무릎을 크게 다쳐 수술을 한 적도 있다. 자연스럽게 나는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승무원 학원 수업이 거의 없어지고 동생의 권유로 나는 동생의 센터에서 필라테스 레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센터 근처의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주머니 사정 상 집이라기보다는 작은 방 하나를 바로 계약했다.
이제 물러설 곳 없는 나는 이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뿌리를 내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