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좀 사그라들었지만, 지난 4월 아니 작년 10월부터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슈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어마어마한 미술품 컬렉션. '세기의 기증'으로 불리는 이건희 컬렉션은 이건희 회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문화재 및 미술품 약 23,000점을 말한다. 여기에는 국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보물 <고려 천수관음보살도>, 이중섭의 <황소>,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와 같은 한국 작품뿐만 아니라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등 서양 명화도 포함되어 있다. 7월부터 일반에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 예약은 대학 수강신청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 언감생심 가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쯤이면 괜찮겠지'하고 시도해봤는데 웬걸, 여전히 1분도 안되어 매진... 그러다 인터넷에서 본 전시 예약 팁 덕분에 성공! 원래는 문화재를 전시한 국립중앙박물관을 보고 싶었지만 9월에 끝나서 2022년까지 운영하는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미술명작 전시를 가보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나에게 조금 낯선 곳이었다. 경기 서북부 주민이었던 내가 그나마 서울에서 익숙한 동네가 여기였기 때문에 이 동네 근처를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이 경복궁 근처에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가 알고 있던 이 지역의 미술관이라고는 덕수궁 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일민미술관 정도였는데. 찾아보니 역시나, 2013년에 개관을 했다고 한다. 내가 프랑스에 간 게 2013년이니 몰랐던 게 어쩌면 당연한 일. 그나저나 나 정말 프랑스에 오래 있었네. 이렇게 깜짝깜짝 놀라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무슨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도 아니고.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은 '현대' '한국' 미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가 두 개나 붙어 있는 20세기 초중반 한국 근현대 작품 중 50여 점의 대표작을 선보인 전시였다. 유화가 처음 등장한 일제 강점기의 조선에서부터 해방과 전쟁을 거쳐 새로운 미술의 길을 모색하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 미술사가 전시에 녹아있었다. 23,000여 점 중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은 1,488점(국내 1,369점, 국외 119점)으로 1950년대 이전 작품이 320여 점, 작가의 1930년 이전 출생연도를 기준한 '근대작가'의 작품은 860여 점으로 58%이다. 작가로는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이응노, 유영국, 권진규 및 끌로드 모네, 까미유 피사로 등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작품만으로도 어마어마한데 이보다 15배나 더 되는 작품을 기증했고, 이외에도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수와 퀄리티를 놓고 본다면 이건희 회장이 생전 수집한 문화유산과 미술품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故 이건희 회장이 바라보던 문화유산과 수집, 보존의 의미
시간을 2년 전으로 돌린 2019년 3월, 코로나 따위 존재하지 않았던 어느 화창하던 봄날. 나는 루이뷔통 재단에 있었다. 인상파 화가의 컬렉션 중 하나이자 영국의 기업가이자 후원자였던 사무엘 코톨드(Samuel Courtauld)의 컬렉션이 60년 만에 파리에서 처음 선보이던 자리였다. 코톨드는 약 60점의 그림을 포함하여 110여 점의 작품을 수집하였고 수집품은 대부분 영국의 코톨드 갤러리(Courtauld Gallery) 및 해외 여러 기관에 보존되어 있다. 당시 코톨드 전시회는 권위 있는 공공 기관이 수집한 모더니티의 중요한 걸작을 한데 모아 주최한 MoMA, 16년에 방문했던 세르게이 슈킨 컬렉션과 같은 이전의 전시회와 마찬가지로 미술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수집가의 위치를 알리고자 하는 루이뷔통 재단의 열망을 구현한 전시회였다. (참고로 현재는 러시아 모로조프 형제의 컬렉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잠시 명화 감상 타임. 이 작품은 전부 내가 찍은 사진들이다. 너무 많아서 각각의 설명은 생략.
다시 시곗바늘을 2년 전으로 돌린 2017년 11월. 이번엔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 어느 추운 겨울날.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 때 쓰기 위해 만든 왕관을 장식한 황금 월계수 잎 중 하나가 퐁텐블로의 오스나(Osenat) 경매장에 나타난다 하여 취재를 나갔다. 황제 대관식을 준비하던 나폴레옹은 왕관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해 왕관을 만든 금세공인인 마르탕 귀욤 비에네(Martin Guillaume Biennais)에게 왕관을 장식하던 6개의 금박 잎사귀를 뺄 것을 요구했다. 비에네는 떼어낸 잎사귀를 딸들에게 나눠주었다. 6개의 잎사귀 중 행방을 알 수 있는 건 2개로, 하나는 퐁텐블로 성에 있는 나폴레옹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나머지 하나가 경매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올해 사망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아니 전 세계적으로?) 나폴레옹의 인기는 여전하다. 프랑스 취재진은 물론이고 한국의 취재진인 우리까지 참여했을 정도니까. 그리고 그 뜨거운 열기 속에는 나폴레옹 컬렉션 수집가인 피에르 장 샬랑송(Pierre Jean Chalençon)도 있었다. 현장에서 알고 보니 이분은 매우 유명한 나폴레옹 수집가였다. 그래서 예상치 않게 이 분에게 인터뷰가 집중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 컬렉션에서 샬랑송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고 하니까. 우리가 한국에서 온 취재진이라고 말하니 몇 년 전 한국 사람이 경매에서 나폴레옹 모자를 사 가지고 갔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에서 나만 이 말을 알아들었다는 슬픈 이야기는 덤...
결과적으로 마지막까지 익명의 전화 경매자와 접전을 벌였던 무슈 샬랑송은 아쉽게도 황금 잎사귀를 놓쳤지만 그 외에 여러 나폴레옹 관련 물품을 낙찰받았다. 그날의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인데, 바로 경매에 참석한 루브르 박물관 관계자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비에네가 만든 유일한 남성용 보석함을 낙찰받았다. 루브르 박물관이 낙찰받자, 청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박수로 환호하였고 경매 사회자는 '프랑스에 남게 되어 다행이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4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이 장면은 이건희 컬렉션과 오버랩되었다.
그래서 이 얘기들을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지난 4월에 이 기사를 봤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이건희 회장의 방대한 컬렉션 규모와 금액적 가치를 넘어선 문화유산적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번 기증 목록을 보고 안 교수가 가장 반긴 것은 불교 불화인 '천수관음보살도'다. 그는 "한국 미술사에서 불화가 매우 중요한데도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불화가 없어 늘 안타까웠다"며 "이제야 빈자리가 메꿔지게 됐다. 국립박물관이 비로소 부끄러움을 면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이건희 컬렉션은 절대로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라며 "좋은 컬렉션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건이 모두 충족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4가지 요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재와 미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냥 관심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지대한 관심이어야 한다. 둘째, 좋은 작품과 중요한 문화재를 알아보는 높은 안목이 있어야 한다. 셋째,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 바로 결정할 수 있는 결단력도 필요하다. 소장할 기회가 왔는데 우물쭈물하다가 놓치는 경우도 많다. 넷째, 그걸 확보할 수 있는 재정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출처: 중앙일보] "돈 있음 된다? 이 의지는 광기" 이건희 컬렉션에 놀란 미술계
퐁텐블로의 경매장에 참석했던 루브르 박물관은 좋은 작품과 중요한 문화재를 알아보는 높은 안목, 구매를 바로 결정할 수 있던 결단력,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재정적 능력, 그리고 문화재와 미술품의 가치와 의미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플러스 루브르 박물관이 작품을 낙찰받자 온 마음으로 기뻐하는 청중들까지) 이 4가지 요건이 전부 맞아떨어져 그날 루브르 박물관은 비에네의 유일한 남자용 보석함을 프랑스 땅에 남길 수가 있었다. 청중들은 그 가치와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그 숨 가쁜 경매 현장에서 진심을 다해 루브르 박물관에 박수갈채를 쏟아 내었다.
이번 세기의 기증을 통해 이건희 박물관이 만들어질 것이고, 이건희 박물관 및 각 지역의 박물관, 미술관에서 유수한 명작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돼서 기쁘다. 그리고 이 기회에 미술품 물납제도가 정착되면 더 좋겠다. 또 한편으로 컬렉션의 총감정가가 얼마인지 평가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 무엇보다도 컬렉션에 담긴 문화재와 미술품의 가치, 그리고 평생에 걸쳐 문화유산과 미술품을 사랑한 수집한 한 사람의 노력과 의미를 먼저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혹시라도 누가 알랴, 이건희 컬렉션이 MoMA, 세르게이 슈킨, 코톨드, 모로조프 전시회에 이어 루이뷔통 재단이 헌정하는 수집가 시리즈에 이름을 당당히 올리게 될지.
P.S 1
2019년 코톨드 전시회 보고 난 뒤 인스타에 올린 나의 감상. 프랑스에서 공부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어릴 때부터 수많은 진품을 보고 자란, '자신의 역사'를 공부하는 프랑스 학생들과 상대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는데, 그래서 저런 푸념을 남겼던 것 같다. 그런데 '세기의 기증' 덕분에 이제 우리나라도 이게 가능해졌다. 2년 만에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꿈에도 상상 못 했다. 나에게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생긴 것보다 더 천지가 개벽한 느낌
P.S. 2 혹시라도 이건희 컬렉션 예약 팁을 알고 싶어서 들어오신 분들을 위해
지금은 예약 시간이 18시로 바뀌긴 했는데, 우선 예약 창이 열리기 몇 분 전에 국립현대미술관 사이트에 미리 로그인을 해 놓는다. 그리고 18시가 되면 무지성으로 시간 클릭! 내가 봤던 팁에서는 오후보다 오전이 덜 인기가 없다고(?) 하여 나는 오픈 시간이자 가장 이른 시간인 10시를 노렸다. 관람 허용 인원이 30명에서 60명으로 늘어났다고 하니 전보다는 조금 수월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