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미술, 그리고 문화유산과의 관계
[...] 부부의 맏아들인 야심만만한 청년 옥따브가 빠리로 상경해 사업과 여인을 수단으로 성공을 꿈꾸며 벌어지는 일을 담은 『집구석들』은, 그의 부모에 대한 언급이나 가정적 배경이 축소되어 있으므로 ‘루공 마까르’ 제10권이라는 부담감은 떨쳐도 좋을 것이다.
한편 『집구석들』은 졸라가 과학 실험을 하듯 소설을 써야 한다는 ‘실험소설론’을 주장하며 치밀한 관찰과 수많은 자료에 의거해 쓴 대표적 작품 중 하나다. 그때까지 문학작품의 소재로 금기시돼오던 빈민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침으로써 당시 문단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키고 거센 비판의 표적이 됐다. 부르주아의 위선적 삶을 제2제정 시대의 가정들을 통해 신랄하게 드러낸 이 작품을 통해, 빠리의 한 모퉁이 슈아죌 거리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삶을 묘사한 자연주의 소설기법의 정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집에 있을 때는 보통 저녁 먹기 무섭게 잠이 드는 깡빠르동이 예술가다운 쾌활함을 되찾아 국립미술학교 시절의 해묵은 익살과 야한 노래들을 되살려낸 것이다. <집구석들>, 창비, 257쪽
거의 같은 때에 깡빠르동이 신바람 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가만히 참고 있을 수가 없는지 몇마디 토막말로 아주 좋은 일이 생겼다고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생로끄 성당 보좌로 있는 모뒤 신부가 공사를 맡겼는데, 간단한 보수공사지만 자기 장래에 엄청난 보탬이 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집구석들>, 창비, 24쪽
"그렇소, 내가 에브뢰에서 교구 지정 건축가로 임명되었어요. 물론 돈벌이로 보자면야 형편없지. 통틀어봤자 일년에 겨우 2000프랑이니까. 하지만 할 일도 별로 없고 이따금 한번씩 그쪽에 다녀오기만 하면 되니까 뭐. 게다가 현지에 감독관도 하나 있고. 이봐요, 명함에 '정부 지정 건축가'라고 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거라니까. 그 덕분에 상류사회에서 일거리가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요."
<집구석들>, 창비, 18쪽
모뒤 신부였다. 건축가가 거기 없었으므로, 그는 자기가 열과 성을 다해 지휘하는 중인 십자고상 보수작업을 옥따브에게 부득부득 구경시키고 싶어 했다. 그는 옥따브를 성가대석 뒤쪽으로 데리고 가서 먼저 동정 성모 제단을 보여주었다. 벽이 흰 대리석으로 된 그 제단 위에는 그리스도가 탄생한 구유를 중심으로 로꼬꼬 양식의 성 요셉상과 성모 마리아상, 예수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계속해서 신부는 금으로 만든 일곱개의 등과 금촛대들, 황금빛 스테인드글라스의 황갈색 그림자 속에 번쩍이는 금제단을 갖춘 '영원한 흠숭의 제단'을 가로지르게끔 옥따브를 안내했다. 그러나 거기는 이곳저곳에 판자로 세운 칸막이가 성당 끝 쪽을 막고 있었고, 보일 듯 말 듯 떨리는 침묵 속에 무릎 꿇고 기도문을 웅얼웅얼 외우는 검은 그림자들 위로 곡괭이질 소리며 목수들의 목소리며 공사장의 요란한 소들이 온통 울려 퍼졌다. [...] 판자 저쪽에는 회반죽이 쏟아져 있고, 흰 석회가루가 날아다니고 질퍽한 물 때문에 습기가 찬 채로 성당 한구석이 한데를 향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 무엇보다 압권은 발치에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를 거느린 십자가의 그리스도상이죠. 그것을 석재 꼭대기에 걸고 회색 바탕에 하얀 석상들을 부각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아까 말했듯이 둥근 천장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눈에 안 보이는 광선처럼 환히 비춰주어 석상들은 앞으로 튀어나와 보이고 초자연적인 생명력으로 활기를 띠게 되지요. 다 된 다음에 보시오, 보시라고요!"
[...] "저기 앞에 보이는 중앙 통로의 양쪽 창들을 열어놓는다고 생각해보시오. 그리고 동정 성모 제단에 가 있어보시오. 제단 위로, 영원한 흠숭의 제단을 건너, 저 끝 쪽에 십자고상이 보일 겁니다. 그러면 감실이 있는 저 우묵히 들어간 공간에 스테인드글라스, 전등, 금촛대들로 연출되는 신비스러운 밤 같은 분위기를 배경으로 이 세 중심 형상이 내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극적 효과 말이오. 그 효과가 상상이 되시오? 저항할 도리가 없을 만큼 매혹적일 것 같지 않나요?
<집구석들>, 창비, 272~274쪽
적이 남기고 간 재산인 적산을 유산으로 여기는 이유는 서양 건축 덕심 때문일까, 아니면 문화유산적 사명 때문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늘도 나는 사라진 근대 건축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