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_정혜신, 해냄, 2019
아이 발바닥에 사마귀인지 티눈이 박혔다. 약국에서 밴드를 구입해 발바닥에 붙이고는 남편의 집도하에 손톱깍이로 굳은살을 제거하려고 해봤으나 애먼 생살만 상처내는 불상사가 일이났다. 아이가 걷는 모습을 보니 여전히 불편해 보인다. 발바닥을 제대로 쓰지를 못하고 움츠러드는 발가락을 보면서 근처 피부과를 검색했다.
‘엄마 너무 무서워.’
‘에고, 무섭지 연지야? 에고...’
병원에 당도하기까지 두어시간 남짓 아이를 위로해 보았지만 그녀의 두려움을 어찌 다 알아챌 수 있을까. 진료를 시작하고 연지의 두려움은 점점 커져갔다. 그대로 두면 바이러스가 점점 기승을 부려 치료 부위가 넓어질 수 있으니 이쯤에서 도려내는 시술을 하는게 나을 것 같다는 진단이 나왔다.
‘선생님, 아플까요?’
‘너, 예방 주사 맞아 봤지? 그거 맞을 때 아팠어?’
‘아니요. 주사 맞을 때 아프지 않았어요. 잘 맞았어요.’
‘그때랑 비슷할꺼야.’
‘선생님, 레이저로 도려내는거예요?’
‘응, 주사를 맞고 레이저로 도려내면 돼.’
‘레이저 안 아파요? 선생님?’
‘주사 맞을 때 한번은 아플꺼야. 하지만 그 다음엔 괜찮아.’
‘무서워요 선생님.’
‘내가 너를 계속해서 달래줄 수가 없어. 뒤에 대기 환자도 많고. 어머님 어떻게 하실껀가요?’
진료의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나는 조바심이 일어났다. 아이의 거듭된 질문에 참을성 있게 대답해주던 의사의 마지막 질문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서둘러 결정을 해야하는 순간이 왔다.
‘치료해주세요 선생님!'
치료실에 가서 아이를 침대에 뉘였더니 아이의 두려움이 처음보다 가중되었다.
‘금방 끝날꺼야. 주사 맞을 때 따금하고 치료할 때는 아프지 않을꺼야. 엄마 핸드폰으로 재미있는 영상 하나만 보면 끝나 있을꺼야. 치과에서도 잘 했었지? 그때 아주 잘 했잖아.’
‘엄마, 너무 무서워 엉엉. 엄마 이거 꼭 해야 돼?’
‘지금 하지 않으면 세균이 점점 많아진다고 하는 얘기 들었지. 지금 하는게 좋을 것 같아.’
‘엄마, 너무 무서워 엉엉. 엉엉. 나 영상 안 볼래. 못 보겠어. 너무 무서워, 엉엉.’
처음엔 달래다가 치료 시간이 임박해지면서 가뜩이나 겁에 질린 아이에게 무서운 표정까지 지어가며 빨리 치료를 끝내고 싶었다. 몇 번의 발버둥과 의사의 채근이 잦아지면서 내 마음은 처음보다 더 많이 불편해졌고,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의사의 호된 질책이 따라올 것만 같은 불안함이 뒤따라왔다.
'엄마, 나 정말 무서워. 엄마 엉엉.'
'어머님, 이렇게 발버둥을 치면 제가 치료를 할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진료비에 치료를 위해 준비된 주사비까지 청구해주세요.’
훽 돌아서 나가는 의사가 야속하면서도 아이에게도 서운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계산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펙이 감정이다. 감정은 존재의 핵심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향, 취향 등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구성 요소들이지만 그것들은 존재의 주변을 둘러싼 외곽 요소들에 불과하다. 핵심은 감정이다. 내 가치관이나 신념, 견해라는 것은 알고 보면 내 부모의 가치관이나 책에서 본 신념, 내 스승의 견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그래서 감정이 소거된 존재는 나가 아니다. 희로애락이 차단된 삶이란 이미 나에게서 많이 멀어진 삶이다. (p.57)
상대방은 힘들고 다급해 보이는데 내가 피곤하고 심란해서 공감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때도 우선은 자기 보호다. 자기 보호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가 힘들어 보인다고 개입하는 것은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다급한 마음에 무작정 뛰어드는 것과 같다. 둘 다 불행해진다. 우리 모두는 자기 보호를 잘해야만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상처 입은 존재들이다. 예외가 없다. 공감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을 내게 묻는다면 단연코 자기 보호에 대한 민감함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기간 동안, 어떤 특정 맥락과 상황 속에서는 내가 참고 견딜 수도 있지만 나는 항상 그래야 하는 존재,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자기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어야 공감자가 될 수 있다. 나와 너를 동시에 공감하는 일은 양립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 '공감'이다.(p.193~p.194)
진료의한테 야단을 맞은 내 마음이 불편하다. 아이를 보듬어야하는데 나는 지금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집으로 오는내내 전전긍긍했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두려웠을 아이를 안아줘야 하는데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현관까지 도착해서 집으로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놀이터로 방향을 선회해본다. 내내 긴장했을 아이에게 환기를 시켜줄 요량주고 미처 다 가라앉지 못한 내 마음도 위로가 필요하다.
'놀이터 잠깐 들렀다 갈까?'
'응. 엄마 미안해.'
'엄마가 바로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네 좀 타고 가자.'
'그네 타도 돼?'
'그럼, 많이 무서웠지?'
'응.'
'그네 타면서 기분 전환 좀 하라구.'
'알았어 엄마, 나 그네 타고 올께~'
엄마를 뒤따라 오면서 내내 엄마 눈치만 살피던 아이를 보니 나란 사람 참 초라해 보인다. 사실 아무도 혼이 나지 않았고 책정된 진료비를 성실히 납부했으며 미안할만한 일은 다른 환자들보다 진료 시간을 조금 더 빼았은 것 뿐인데 나는 마치 나를 혼내는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움츠러 들었다. 꾸지람을 들을까 겁을 내던 잊고 있던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감정은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의 이분법으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감정은 한 존재의 지금 상태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바로미터다. 내 빰을 스치는 바람 한줄기마다 고유한 이름과 성질을 붙이고 규정지을 수 없듯 끊임없이 움직이는 감정은 내 존재의 상태를 시시각각으로 반영하는 신호다.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래서 모든 감정은 옳다. 불안을 느낀다면 ‘이러면 안 되는데’할 게 아니다.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왜 그런 걸까?’ 곰곰이 나와 내 상황을 짚어봐야 한다.(p.220)
아들에게 마지못해 동의하고 단서를 달았던 허락에 대한 내 생각도 말했다. “나중에 딴소리 마라, 후회하거나 힘들단 소리 하지 마라”는 강요성 다짐은 아이의 퇴로를 막은 거나 마찬가지다. 진로는 몇 회까지 바꿀 수 있다는 법조항이라도 있는가. 없다. 직업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열번, 스무 번 계속 바꾼다고 안 될 이유가 없다.
계속 바꾼다는 건 흔히 생각하듯 게으르거나 끈기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자기를 찾기 위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고민 속에는 ‘왜 나는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오래 하지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도 늘 함께 들어 있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당사자는 그런 자신에 대해 남보다 더 많이 자책하며 생각한다.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거나 힘들다고 하지는 마라” 같은 강요는 아이의 퇴로를 막고 철창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다.(p.234)
대다수 부모들의 마음이나 반응도 한국부모협회에서 지침을 받은 듯 비슷하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려고 그랬겠느냐. 아이를 바로잡아 주고 싶고 제대로 가르쳐야 할 의무가 부모에게 있으니 그랬지.” 아니다. 잘 모르고 깊이 생각 안 해서 그런 거다. 그런게 계몽자의 게으른 자세다. 교육의 거죽을 쓰고 있지만 폭력이다. (p.307~p.308)
성장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길이 어느쪽인지 찾아갈 수 있다.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은 아이가 어떤 길을 걸어가든 온전히 믿어주는 것이다. 부모의 얇은 지갑 덕에 가던 길을 쉽사리 멈추는 일을 막아버리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아이가 원할 때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아이가 원하지 않을 땐 언제라도 그만둬도 괜찮다는 말을 건넬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 단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무언의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는지 되돌아 본다.
그리고 이미 막혀버린 퇴로로 인해 뒤돌아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나의 어린 시절. 무의식중에 대물림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오늘의 경험으로 지금의 나와 같은 모습으로 불안한 감정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더럭 겁이 난다. 아이를 억압해 치료받지 않고 그쯤에서 나오길 얼마나 다행이였는지 가슴을 쓸어내린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p.297)
너무 힘들어 누군가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상대가 앞에 있는 순간에도 충조평판하지 말고 그저 ‘당신이 옳다.’ 그런 마음이들만 했다. 그런 마음도 옳다고 말해야 한다. 정말 죽고 싶어 죽는 사람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도 없다. 그 생각의 기저에 깔려 있는 마음을 온몸으로 공감해줌으로써 나도 구하고 너도 구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가 지은 글이지만 머리 아픈 의학 용어나 심리학 용어로 도배 된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치유자 정혜신의 현장 경험과 내공을 집대성해 놓은, 쉽고 전문적인 그런 책이다. 읽는 책이 아니라 행하는 책이다.이 책은 심리적CPR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책이라기보다 행동 지침서라고 보면 된다.
이 땅위에 살아가는 사람중에 상처가 없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는 가설에서 출발했다. 정혜신의 귀결은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우리 모두 옳다는 결론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준다. 삶의 지침서로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읽어보면 참 좋을 그런 책이다.
지은이 정혜신은 30여 년간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며 1만 2천여 명의 속마음을 듣고 나누었다. 최근 15년은 정치인, 법조인, 기업 CEO와 임원 등 자타가 인정하는 성공한 이들의 속마음을 나누는 일을 했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트라우마 현장에서 피해자들과 함께했다. 저자는 자격증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 살리는 사람이 치유자라고 말한다. 현장에서 쌓아 올린 30여 년의 치유 경험과 내공을 집대성하여 이 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