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생명을 왜...
하림이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한 마디, 한 마디를 모아 글을 작성하고 있는 중이다. '공부할수록 마음이 좁아지는 것 같아요.', '곧! 추격전이 시작된다.', '수행평가가 휘몰아치고 있어요.' 등등 아이의 말을 톺아보며 글을 쓰면서 아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으로 살아왔는지 깨닫고 있다. 아이가 생활했던 흔적을 들춰보면서 학교 생활에 대해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부분도 생겼다. 나는 아이를 이해하는 이 시간이 감사하기도 하지만 실은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일찍 알았더라면 하림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했을 텐데... 아무튼 오늘도 하림이를 더 알기 위해 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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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험 볼 때 목숨이라도 걸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하림이가 중학교 2학년 첫 중간고사를 치른 뒤, 소회를 밝히는 한 마디였다. 당시에는 아직 어린아이가 '목숨'이라는 말을 해서 귀엽게만 느껴졌다. 때때로 이와 같이 상징적인 말을 하는 하림이의 표현이 그저 장난 섞인 표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메모만 남겼다.
그런데 지금 다시 아이의 문장을 적고 보니 '목숨'이라는 말이 비장하게 느껴진다. 혹시 아이는 정말로 목숨을 걸고 시험공부를 한 것이 아닐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됐다.
나는 하림이의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하림이는 초등학교 때 작성한 네모칸 일기장, 학교 문집, 교회 주보 등 문서를 모은다. 그중에 하림이가 차곡차곡 모아놓은 시험공부 자료, 시험지, 성적표를 살펴보았다. 그 안에서 나는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하림이의 세계를 또 발견했다.
1. 자신만의 공부 방침
하림이는 공부 방법을 미리 정해 놓았다.
'교과서를 읽고 교과서 문제도 모두 푼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새겨듣는다. 자습서를 읽고 문제를 푼다. 노트에 꼼꼼히 정리한다.'
시험 기간에는 또 다른 규칙이 있었다.
'무작정 외운다. 보지 않고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외운다. 공부는 영어, 사회, 과학, 국어, 수학 순으로 한다. 몇 번 외운 후 빈 종이에 내용을, 그대로 쓴다.'
과목별 공부 방식도 따로 있었고, 오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자신만의 표기법까지 있었다. 시험 대비 계획도 철저했다. 시험기간 4주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자습서를 읽고, 평가문제집을 푸는 등 자신만의 일정이 있었다.
2. 완벽을 향한 집념
하림이의 공부의 마지막은 '백지법'이었다. 자신이 외운 것을 종이에 생각나는 대로 작성하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중학교 2학년 첫 학기 시험 때 작성한 역사 과목 백지법이다. 연대별로 사건과 특징이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 부록으로 실어도 손색없는 수준이었다.
아마도 한 번에 전체를 외운 것은 아닐 것이다. 챕터별로 혹은 시대별로 한 꼭지씩 공부하면서 적어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정리된 백지법 자료가 매 학기 시험마다, 과목별로 있었다. 하림이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완벽을 추구하며 공부했던 것이다.
3. 시험공부 프로토콜
첫 번째 사진은 하림이가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원칙이었다면 아래 사진은 실제로 하림이가 공부할 때 계획을 세우고 이행한 근거 자료다.
먼저 하림이는 시험 기간과 시험 범위를 적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공부 방침을 간략히 요약하여 한 줄로 작성했다. 과목별 학습자료를 표로 만들고 날짜별로 골고루 채웠다.
흥미로운 것은 시험 이후 자기 자신에 대한 피드백이다. 시험 성적을 기록하고, 친구들과의 비교도 해놓았다. 시험에서 깨달은 점까지도 꼼꼼하게 작성했다. 다음 시험공부에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이제야 알겠다. 무심코 흘려 들었던 하림이의 말, '목숨 걸고 공부했다'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것을. 하림이는 자신의 첫 시험에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자신만의 공부 방침을 세웠고, 그 방침에 따라 공부 계획을 해 철저히 실행했다.
나는 아이의 열정을 몰라주었던 무심한 엄마였던 것이다. 부끄럽고 미안하다. 아이가 '목숨'을 걸었다고 했을 때 그 의미를 잠시라도 생각해 볼 것을. 이제 와 후회가 되고, 지금이라도 아이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제 하림이는 입시의 결승선 앞에 서 있다. 수시 원서 접수는 3주 앞으로 다가왔고, 수능까지는 100일이 채 남지 않았다. 한때 전력질주하던 입시 경주마는 겨우 트랙 위를 힘없이 걷고 있다, 무거운 등짐을 짊어진 채.
부모의 말을 비판 없이 수용했던 하림이.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썼던 하림이는 더 이상 열심히 살고 싶지 않아 한다. 너무 이른 나이에 자신을 소진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림이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하림이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오늘도 밤늦게 귀가하는 아이를 애잔하게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