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이자 학생으로, 새로운 인생의 시작

by 아마로네

그날은 그리스 여행을 다녀온 지 사흘째였다. 오랫동안 꿈꾸던 여행, 어느 여행에서나 그랬던 것처럼 현지 맥주 - 당나귀 그림이 그려진 맥주는 참 맛있었다 - 를 잔뜩 마시고 많이 걷고 스노클링을 즐기는 알찬 여행이었다.


여느 직장인처럼 일요일 밤에 도착해서 월요일에 출근하는 빡빡한 휴가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니 피곤한건 물론이고 시차적응이 영 쉽지 않았다. 원래도 퇴근후 맥주 한 캔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밤에 억지로 잠들기 위해 어제도 그제도 편의점 맥주 네 캔을 해치웠다. 오늘도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사오는 길, 시차적응이 안된다고 이렇게 피곤하고 힘들 일인가, 확실히 늙었나보다 생각하다가 문득 멈칫, 불안함이 엄습했다. 에이 설마. 한 손에 맥주 네 캔이 든 봉지를 들고 근처 약국에 들러 '임신 테스터기'라는 것을 처음 사봤다. 찜찜한 기분을 떨치고 개운하게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 였는데, 세상에.


침대에 가로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퇴근한 남편이 발견했다. 뭐하고 있어? 라길래 말없이 테스터기를 보여주었다.

"이게 뭐야? 임신이라는 건가..?"

"그런가봐"

"헉,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는건가?"

"그러게...."


남편의 대사가 영 거슬린다는 분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게 딱 내 심정이었다. 우리는 딩크로 만 5년간 결혼생활을 해오다 "아이가 있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으려나?" 하는 대화를 나눈게 불과 약 두 달 전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이 결혼생활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고 어떤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지난 2주간 마신 수많은 맥주와 커피, 스노클링, 하이킹 등등도 떠올랐다.


다음 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산부인과에 갔다. 내심 테스터기가 잘못되었기를 바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피검사를 해야한다고 들었다고 했더니, 의사 선생님은 이미 아기집이 충분하게 생겨서 피검사는 필요없다며, 축하한다고 하셨다. "어떻게 이제야 병원에 오셨어요? 아직까지 모르셨어요?" 라면서. 그러게요. 제가 좀 둔한 걸로 유명합니다.


임신확인서류를 받아들고 황망하게 사무실에 앉았다. 내년 2월에 내 아기가 세상에 태어날 예정이라고 한다. 시커먼 배경에 하얀 점이 있는 사진도 몇 장 들어있었다. 남편에게 그 사진을 전송해주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갑자기 앞자리에 앉은 후배가 "언니 축하해요! 정말 잘되었다아!"라며 나에게 다가왔다. 뭐지? 내가 병원가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걸까?


"언니 해외 석사과정 선발되었대요. 지금 문서왔어. 와 정말 너무 좋겠다!"


아 그래, 내가 그런 걸 지원했었지. 선발되면 1년간 준비하고 내년 여름에 학교에 입학해서 석사과정을 마치는 프로그램이었다. 여행가기 직전에 지원신청 공고를 보고, 지원한다고 선발될 가능성도 적은데 하면서 지원서를 냈었다. 아이를 가져볼까 한다고 아이가 바로 생기는 것도 아닌데, 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들이 한꺼번에 내 인생에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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