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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로네 Jul 22. 2024

베개로 알아보는 그녀의 마음

열이 난 어느 밤


아이는 아기때부터 꾸준히 아빠보다 엄마인 나를 더 좋아했다. 남편과 나는 함께 육아하는 부모인데 ’애는 엄마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하는 어른들의 말이 듣기 싫었지만, 복직 전 함께 한 시간이 길어서인지 아이의 마음을 어쩔 수는 없었다. 나와 있을 때는 밤낮없이 나에게 철썩 붙어있으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집안일이 남편 차지가 되었을 정도다.


조금이라도 균형잡힌 애착관계를 만들어보고자 주말에 혼자 몇 시간 외출을 감행하며 노력했지만, 둘을 두고 나갈라치면 현관문을 나와도 아이의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사랑을 받는건 행복하고 감사하지만 때로는 지치고, 이대로 아빠와 평생 데면데면하게 크는 건 아닐까 초조하기도 했다.


가장 힘들고 걱정이 많아지는 건 주로 한밤중이었다. 항상 시작은 패밀리침대에서 나란히 잠들지만 중간에서 자던 아이는 나를 찾아 굴러오고, 나는 무겁고 더워서 살짝 멀어지고, 멀어진 걸 알아챈 아이가 나를 찾아 조금 더 굴러오는 한밤의 추격전(?)이 벌어지다보면, 깊은 잠은 고사하고 벽까지 밀려나서 똑바로 누워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아이가 깨지 않게 살살 중간으로 밀어내면서, 옆에서 혼자 2인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편안히 자는 남편에게 매일 밤 괜히 눈을 흘겼다.


그러던 며칠 전 잠자리에 들 때였다. 언제나처럼 남편 베개는 저 멀리 혼자, 아이의 작은 베개는 내 베개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내가 먼저 누운 채로 아이에게 어서 눕자- 하는데 아이가 잠깐 베개를 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자기 베개를 슬쩍 밀어 중간으로 보낸다.


“왜? 베개 안 베려구?“

“아니, 아빠 옆에서도 엄마 옆에서도 자고 싶어서.”


그러더니 요리조리 굴러다니며 아빠한테 기대보았다가, 엄마한테 안겨보았다가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둘은 제법 친해졌다. 원래도 남편 말에 따르면 내가 없어지면 아무렇지 않게 둘이 잘 논다고 했었지만, 지금은 내가 근처에 있어도 무언가 하고 있는 것 같으면 바로 아빠를 찾아간다. 전형적인 T 인간인 남편은 표현이 서투른 유아의 마음을 읽는 데는 미숙했지만, 말과 의지가 또렷해진 6세 어린이의 지시를 따르며 놀이하는 데에는 제법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 때가 있었던 것인데, 뭘 그렇게 억지로 관계를 만들어내려고 조급해 했었나 싶다.


침대 중간을 지키며 자던 아이가 유난히 뒤척대기에 살펴보니 며칠 전 물놀이 탓인지 열이 올랐다. 체온을 재고, 내복을 벗겨두고, 열을 내려주는 패치를 이마에 붙이고, 살짝 깬 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여 다시 재웠다. 잠귀가 어두운 남편은 언제나처럼 기척도 없이 자고 있지만, 혼자 아이를 챙기는 밤이 어쩐지 여느 날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열이 나서 추운지 웅크리며 쉬이 잠들지 못하던 아이는 잠시 허우적대더니 아빠 손을 찾아 살며시 잡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깜깜한 방에서 한참 깨어 있어 밝아진 밤눈으로, 졸린지도 모르고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오래 지켜 보았다.


이사를 가게 되면 아이의 침실을 마련해줄까 생각했는데, 당분간은 이대로 있는게 좋겠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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