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처럼 생각해보기
퇴사 직후, 문득 ‘케렌시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투우장에서 상처 입은 소가 잠시 숨을 고르는 장소, 케렌시아.
그 순간 나는 내게 왜 이렇게 쉽게 번아웃이 오는지,
왜 쉽게 지치고 고립되는지를 물었다.
심리상담사 선생님은 말했다.
“당신은 매우 섬세하고 민감한 센서를 가진 사람이에요.”
그래서일까. 나는 항상 더 조용한 공간, 혼자 사색할 수 있는 장소를 원해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투우 소에게도 쉼을 허락하는 스페인은 내게 상징처럼 다가오는 나만의 회복의 은유였다.
[스페인 책방]은 서울, 충무로의 작은 골목길 사이에 있다.
경기도 성남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길지 않았지만, 내겐 결코 가볍지 않은 여정이었다.
매주 한 번씩 받고 있는 심리상담을 통해 내 안의 ‘어린 나’, ‘상처받은 나’, 그리고 ‘지친 나’를 마주하며,
긴장된 숨을 풀고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황장애를 치료하는 과정은 단지 약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하나의 영상처럼 바라보고 조용히 그 곁에 앉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를 회복하기 위한 시간을 한 동안 보내고 있었다.
분주한 도심에서 살짝 벗어난 충무로는 옛 건물들이 남아있었는데
주변 곳곳은 소형 오토바이와 트랙차들이 오고갔다.
책방이 자리한 충무로는 내게 또 다른 기억을 품은 장소다.
대학생 때 흑백 필름 카메라 실습을 마치고 인화를 맡기기 위해 자주 찾던 곳.
그레이스케일로만 존재하던 빛과 어둠, 사물과 인물을 담으려
작은 렌즈를 들여다보던 내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인화지의 사진들이 선명해지듯 과거의 기억들이
샘솟듯 떠오르자,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 시간 한 곳에 머물고 있어보이는 벽시계가 시간을 말없이 가리키고 있었다.
여행이란, 결국 누군가를 만나는 재미와
우연히 마주치는 사건들에서 비롯되는 흥미로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책방 여행은 다르다. 그 만남의 대상은 책 속에 숨어 있다.
나는 책장을 하나씩 넘기며, 이곳에서 스페인과 연결된 이름들을 찾기 시작했다.
스페인어 문학작가들의 대표작품들이 보였다.
1.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작품집』
2.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3.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4.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가장 먼저 대화를 하고 싶었던 작가는 보르헤스*였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TMI로 말하자면,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나중에는 관장으로 일했다.)
그는 깊고 어두운 기억의 미로를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처럼,
무언가를 꿈꾸듯 창조해내는 서사적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매우 독특한 작가라서 그에게 질문을 한다면 그가 어떤 답을 할지 궁금했다.
그는 여전히 꿈을 꾸듯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의 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조심스레 그의 앞에 다가섰다.
“보르헤스님, 당신의 창작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스페인 문화권에 '알론소'라는 이름이 많은 건 혹시, 『돈키호테』의 알론소 키하노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어떤 친구인가요?”
조금 엉뚱한 질문이었지만, 보르헤스는 들고 있던 책을 덮고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눈은 여전히 감긴 채였다.
보르헤스는 들고 있던 책을 접고서 계속 눈을 감은 채 말을 시작했다.
"당신에게 알론소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는 분명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예요. 세르반테스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솜씨로 그런 친구를 만들어냈죠.
나에게 알론소 키하노는 여행, 인생, 꿈—그 모든 여정에서 함께하는 삶의 친구랍니다"
"가장 친한 친구"라는 말이 내 마음에 깊이 맴돌았다.
나는 아직 『돈키호테』를 읽지 못했지만,
알론소 키하노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아마도 세르반테스가 탄생시킨 돈키호테라는 존재 덕분에,
스페인에서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수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이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피카소의 그림과 조각에서도 느껴지는 유머, 비판, 연민
그 모든 정서 속에는 돈키호테적 정신이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스페인 책방 여행에서 스페인의 모든 것을 다 담아올 수는 없지만,
그곳이 가진 역사, 예술, 따뜻한 유머와 사람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방에서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 한마디.
"실패해도 괜찮아. 실수 해도 괜찮아"
그 말 한마디조차 스스로에게 건네기 어려운 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살며시 펼쳐보기 :)
책방 정보
인용: 보르헤스 말의 글 중에서
"알론소 키하노는 최소한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건 분명해요."
p.s
책방 운영에 도움을 드리고자 방문시 1권씩 구매하는데 돈키호테 대신 보르헤스의 『꿈의 이야기』를 구매했습니다. :)
연재글쓰기는 앞으로 2주에 1회로 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