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랬지

나를 돌아보며....

by 어미이징

가정을 벗어나고 싶었다.

부모님의 다툼은 나의 불안을 증가시켰고, 불편함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잦은 부부싸움으로 불안한 시기를 보냈고,

그 싸움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설거지처럼 끝나지 않았다.

불안한 상태로 나는 성인이 되었고,

성인이 된 지 어느덧 5년쯤 지났을 때

한 명 있는 오빠마저 빠른 결혼을 했기에

나 또한 빨리 나의 가정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매일 다투는 부모님 아래 자라서 그랬는지,

못 받은 사랑을 나의 자녀에게 주고 싶어서 그랬는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랬는지,

나의 꿈은 중학교 시절부터 현모양처였다.


남들은 직업을 이야기하는데 직업보다 가정이 먼저라 생각했고,

그 가정의 울타리는

엄마는 아빠에게, 자녀는 엄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러했으니까..


방황하던 시기에 우연히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몇 년 있다 한 남자를 만났다.

우리는 결혼을 서둘렀다.

둘 다 이 사람이면 된다는 확신이 있었고,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1월 1일에 사귀고, 2월에 상견례를 했으며 더운 여름을 피해 9월 1일에 결혼했으니

속전속결로 결혼을 준비하고, 식을 올렸다.


하지만 결혼은 내가 꿈꾸는 것과는 달랐다.

나와 상대는 크고 작은 것들을 부딪히며 상처를 내고

그 상처를 덧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았다.

우리에게 있는 모난 부분이 깎여야 하고,

깎이고, 깎아낸 부분에 새로운 살이 돋아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모난 부분을 깎을 때의 아픔과 상처는 오롯이 각자의 것이었다.

(왜 그때는 따뜻하게 보듬지 못했는지.. 너무도 어렸다. )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홀로 두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우리의 눈은 새살을 기다리는 기대와 응원이 아니었다.

'네가 그렇기에 네 것을 파내고 다시 새싹을 기다리는 거야.'라는 비판과 정죄를 일삼았다.

새살이 돋고 나서도

"거봐, 당신은 그 정도 인간이었어" 나 아니었으면 평생 그렇게 살았을 거야 라는

자기 방어가 난무했다.


결혼과 동시에 허니문으로 첫째가 찾아왔지만 난 너무 어렸고, 약했다.

부모로서의 생각보다 개인으로서의 생각이 컸었다.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는 부모라는 이름이, 엄마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이따금씩 부모의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이름값을 못했고,

부모로 부여받은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나의 부족함은 불안이 되어 첫째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기도 했다.

나뿐 아니라 우리는 미성숙했고, 우리는 연약했다.

미성숙과 연약함은 후회를 가져왔고, 그로 인해 많이 울었다.


어느 시점인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넷째의 출산과 함께

우리의 시선은 서로에게 향했던 것 같다.

넷째를 낳아서 긍휼히 생긴 건지,

서로를 긍휼히 바라보아 넷째가 생긴 건지는 모르겠다.


긍휼


우리 마음에 들어온 긍휼은 서로 많이 다독이게 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우리의 노력은 일방적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은혜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가 생각한 것은 다르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난 부분이 깎여 갈 때, 때론 내가 스스로 깎아 갈 때

서로 품어주고, 정성껏 돌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모난 부분을 바라보는 두려움과 어리석음에 용기를 더하기도 했다.

아직도 깎이고, 깎여갈 부분이 많지만 어느새 14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미이징 디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