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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버리지 못한 과거들...

[ 붙잡은 기억을 놓아줄 때 ]

by Amberin

놓아버리지 못한 과거들...

언제부터 인가?

숨 쉬는 것조차 스스로 인지하며

중간에 심호흡을 하여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심하게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는 게 어려울 때가 있다.

물건이든, 기억이든, 마음이든,...


떠나보내면 가벼워질 걸 알면서도,

그 무게가 주는 익숙함 속에 머무르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 서랍을 열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과거의 시간이 불쑥 튀어나온다.


서랍 속 깊은 곳,

먼지가 살짝 내려앉은 한쪽에

색이 변하지도 않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노트들이 있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채 고이 모셔둔,

표지를 넘기면 새 종이 냄새가 아직 남아 있는 노트.

언젠가 마음에 쏙 드는 글귀를 적어 넣겠지 하며,

조심스레 안쪽 깊숙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색이 예쁘거나 모양이 예뻐서 사두었던 펜들도,

여전히 그 곁을 지키고 있다.


옷장 속에는 지금 입으면 어딘가 어색하지만

"예쁘다"라는 이유로,

리즈 시절에 입었던 추억이 있는 옷이라며,

몇 번의 계절을 건너온 원피스, 재킷, 블라우스, 등이 걸려 있다.


지금은 잘 맞지 않아 정리하려면 순간 주저하게 된다.

아마도 그 옷은 옷 때문이 아니라,

그 옷을 입을지도 모르는 ‘그 어떤 날’을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 기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익숙함은 편안함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떼어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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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휴대폰 갤러리에서 몇 년 전 오늘이라며

사진이 파노라마로 자동으로 열린다.

그때의 사진을 보면 휴대폰 속에 몇 년 전의 내가 살아 있다.

그때의 웃음소리와 계절의 공기,

손끝에 스치던 온기까지

화질이 좋지 않아 번지고 흔들린 모습 그대로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거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사람들의 사진을 지우려 하면

단순히 ‘이미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나를, 그때의 우리를

다시 돌아오지 않을 어딘가로 보내는 것 같아

삭제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오래 머문다.


짐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오래된 박스를 열어보니

학창 시절에 받은 편지들이 가득했다.

편지지를 열어보면

손글씨 속에는 글씨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마음의 온도와 향기가

한 자 한 자에 묻어 있다.


종이의 결에 따라 번진 잉크,

글씨 끝에 남은 손끝의 힘의 세기마저 그날의 마음을 말해준다.


편지를 버리는 건 단순히 종이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나 사이의 한 시절을 접어 넣는 일이기에,

결국 이런 물건들은 단순히 ‘소유’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그 안에는 내가 살았던 시간이 있고,

그 시간 속에는 그때의 내가 산다.


우리는 정리하고, 놓아주는 것을 주저한다.

그러나 가끔은 우리의 지나온 시간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의 나를 흘러 보내고 새로운 내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간 모든 순간이 순수한 추억만은 아닐 테니까,...


어쩌면 우리 안에는

‘언젠가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집착,

‘잃고 싶지 않다’는 불안감,

‘가지고 있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심리적 안전지대가 숨어 있다.


추억이라는 포장을 두르고 있는 이 물건들은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붙잡아 두는 보이지 않는 끈일지도 모른다.


비우는 것은, 버리는 것은, 종종 용기가 필요하다.

단순히 비워내는 행동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와 감정을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버린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해방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제야 비로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생기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미루고 망설인다.


버림의 순간은,

내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결단이기 때문이다.

놓아버린다고 해서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순간의 온기와 표정, 마음의 결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다른 모습으로 숨 쉬며 살아간다.

그러니 때로는,

가볍게 손을 펴는 용기가 우리를 더 멀리 데려다주기도 한다.


오늘은 오래된 사진첩을 정리해 본다.

그 안에 머물던 나를 가만히 내려놓으며,

새로운 기억이 들어설 자리를 위해 비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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