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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ul 17. 2022

딸에 대하여(김혜진, 민음사)

독서노트 _15

그럴 줄 알았다.


소설 읽기란 나에게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허벅지 살 같은 것이었다. 첫 장 첫 글자에서부터 소리없이 작게 시작된 감정의 물방울은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성난 파도가 되어 나를 쥐어잡고 휘두르고 있다. 떨쳐버리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아예 소설 읽기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징글맞은 허벅지 살도 그랬을 것이다. 언제 이렇게 두터워진 채로 흔들거리며 내 몸을 장악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소설을 피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나도 모르는 새에 내 몸과 마음을 장악하는 것은 튼실한 허벅지 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나는 책을 읽으며 내내 나의 이성과 의식이 명료하게 깨어 있기를 바랐다. 책 속의 글자들이 생각을 가지고 영혼을 가지고 그리고 목적을 가지고 나를 끌어들이고 빨아들여서 종내에는 지들 멋대로 찢어 발기고 분해해 버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그 어떤 책을 읽더라도 나 자신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그랬는데 왜, 어쩌자고 소설을 쓰고 싶어졌는지는 알다가도, 아니 영원히 모를 일이다. 그냥, 머릿속에 마음속에 내가 아주 잘 아는, 그러나 영영 모를것도 같는 누군가들이 불시로 혼자서 때로는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데 그들의 발자국이 쿵쿵대는 소리가 갈수록 커져서 견디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고 하면 거짓말일까. 거짓말이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어차피 소설은 거짓말이니까. 내 피와 살로 만든, 거짓말.


그래서, 남의 피와 살로 만든 거짓말을 사다 읽었다.

감당 못할 걸 알면서도 읽었다. 읽으면서 내 손은 내내 허벅지 살을 주물러댔다. 그렇게 하면 가차없이 내 몸과 마음을 후비고 들어오는 잔인한 글자들이 조금은 내게 숨쉴 여유를 줄 것도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 손으로 하는 어설픈 마사지 몇 번에 허벅지 살이 빠지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쓰고 싶으면 이건 감당해야 하는 것,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는 요 며칠간 동성 애인과 엄마의 집에 얹혀 사는 시간강사 딸이 되었다가 그런 딸을 이해해보려 혹은 이해하지 않으려 애쓰며 치매 노인을 보살펴야 하는 엄마가 되었다가를 반복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허벅지 살은 빠지지 않은 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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