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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Apr 30. 2023

빛그물(최정례, 창비)

독서노트 _26

시를 좋아하고 틈틈이 쓰지만 현대시인의 시집 한 권을 다 읽어본 적은 없었다. 나의 시는 얕고 쉬운데 그들의 시는 깊고 난해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려워서, 골치 아프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렇게 쓸 수가 없어 질투나니까. 이게 내가 그동안 시집을 멀리 한 솔직한 이유였다.


그래서 세종사이버대학교(세사대) 시 동아리 '시나브로'에 가입하면서 적잖은 망설임이 있었다. 회사 업무가 바쁘고 나는 우울증으로 정신이 피폐해져 있고 무엇보다도 시집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데 모임에 들어도 되나? 걱정이 꼬리를 물었지만 세사대 학우들의 적극적인 꼬드김(?)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 나도 모르게 모임에 가입하게 되었다.


막상 가입하고 이달의 시집도 추천받았지만 서평을 쓰기란 난해했다. 시에 대한 나의 독해력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또한 10년 가까이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남들이 한 것을 참고해서 따라하는 능력 외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힘은 눈에 띄게 쇠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짧은 공문 하나를 쓸 때조차 전임자가 해 놓은 것을 찾아 베끼는 데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시집 서평이라는 과제가 막막하고 힘들기만 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마감날이 와버렸는데 아뿔싸, 몸이 아팠다. 몸살기로 쑤시고 저린 팔다리를 달래 가며 간신히 몇 줄 적어 이메일로 보내고는 나는 쓰러졌다.


모르고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몇 번을 더 읽도록 몰랐다. 이 시집을 쓴 최정례 시인이 암투병 중 작고했다는 사실을. 나는 그렇게나 무심하게 이 책을 읽었던 것이었다. 서평 리뷰를 듣고서야 그 사실을 안 나는 내가 얼마나 책을 피상적으로 읽었는지를 깨닫고 절로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다른 학우들의 서평을 보고 나서 부끄러움은 배가되었다. 그들이 책을 읽으며 했을 치열한 고민과 사색이 나에게는 없었다. 단지 책 귀퉁이 몇 장을 접어놓은 것으로 수업 준비를 다 했다고 생각한 나 자신이 무척이나 민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집을 펼쳐 읽을 때마다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시인의 시는 '입자들의 스타카토'처럼 서정시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들도 있지만 그보다도 '이불 장수', '겨자소스의 색깔', '냄비는 왜?'처럼 일상에서 찾은 소재를 시화한 것들에서 더 반짝반짝 빛나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로맨스 스캐머와의 이메일을 소재로 한 '나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같은'은 비슷한 내용의 제안(?)을 페이스북을 통해 받아본 입장에서 실소를 터뜨리게 하기도 했다.


5시 55분 기상, 6시 40분 출근, 7시 40분 회사 도착 후 아침 먹고 우울증 약 먹기, 9시부터 6시 혹은 그 이후까지 근무, 그 후에 퇴근, 씻고 집안일하고 잠자기, 다시 5시 55분 기상...이렇게 이어지는 생활 속에서 나는 '일상'의 힘을 잊고 있었다. 아침마다 회사 카페에서 사 마시는 커피가 많을 때도있고 때로는 전날보다 적기도 했는데 그러한 자잘한 변화도 나의 일상임을 생각하지 못했다. 시인의 일상시를 읽으며 내가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그녀의 일상 시어를 통해 반짝이는 냄비나 로맨스 스캐머의 스팸메일 따위조차 시 한 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기백배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최정례 시인의 시는 그렇게 일상에서 시어를 퍼올리는 힘이 있었다. 9년차 공무원의 판에 박힌 듯 똑같은 하루하루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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