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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May 21. 2023

虛, 虛, 虛(빈 배처럼 텅 비어, 최승자)

독서노트_27

어느 밤, 도봉구의 한 대형마트 근처 횡단보도 앞에서였다. 집에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던 나는, 그러나 그 순간 강렬한 허무함에 휩싸였다. 집에 가는 일도,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도,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것도, 하다못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조차도 아무 의미 없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것조차 참을 수가 없던 그때, 나는 사실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생을 놓아버리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실감을 했다.     


최승자의 시들을 읽으며 나는 다시금 그때의 그 미칠 듯한 허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빈 배처럼 텅 비어’라는 제목에서만 이미 ‘비다’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사용된 이 시집은 생에 대한 관조와 허무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치열하게 살아온 젊은 날이 무색하게 생의 절반 가량을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들어앉아 보내야만 했던 시인의 기구한 삶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조(自嘲)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음에 몸부림치는 허무함은 시집과 같은 제목의 시인 ‘빈 배처럼 텅 비어’나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등 여러 작품에서 절절히 드러난다. 특히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는 전체 8개의 행 중 무려 5개에서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데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이 시인이 느꼈던 허무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라는 생각에 숨이 가빠왔다.  

   

시인은 자신의 삶과 시를 관통하는 것이 ‘허(虛)’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시집 전체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글자도 ‘허(虛)’이다. ‘허(虛)’자를 사용한 시 중 ‘모든 사람들이’에서 시인은 “죽음도 무의미해지면 우리는 虛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것의 끝은 죽음이다. 그런데 ‘죽음마저 무의미해지는’ 차원은 과연 어떤 것일까. 虛는 죽음마저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 무엇인 것인가.     


그러나 ‘존재는’에서 시인은 “존재는 無가 아니라, 無虛가 아니라, 虛無가 아니라 그저 ‘虛’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나는 無, 虛無, 無虛(이것은 시인이 창조해 낸 단어일 것이다)와 ‘虛’가 왜 다른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無는 ‘없음’이고, 虛無는 ‘비어서 없음’이며 無虛는 ‘없고 비어있음’일 것이다. 그러나 ‘虛’는 ‘비어있음’이다.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虛無나 ‘아무것도 없는’ 無와 달리 ‘비어 있는’ ‘虛’는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채워 넣을 수 있다. 시인은 그래서 시집 전체를 통해 ‘虛’를 내뱉으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빈 배 안에 채워 넣듯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虛 위에서 춤추는’이나 ‘살다 보면’, ‘아침이 밝아오니’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아침이 밝아오니’에서 시인은 ““나는 살아 있다”라는 농담“이라고 하였다. 언제나 죽음을 지척에 두고 살아왔던 시인에게 아침이 밝아오며 시작되는 하루는 밝고 희망찬 무엇이 아니라 그저 ”시큰거리는“ 것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수억 년 해묵은 농담처럼 하루를 살아가기로 한다. 살아 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삶을 놓고 싶어하면서도 기실 절대 놓고 싶지 않다는 시인의 강렬한 의지를 엿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웃었다. 시인의 어찌할 수 없는 ‘虛’를 견딜 수 없어 웃고, 그 ‘虛’에 희망을 담아 어떻게든 채워 보려는 시인의 의지가 기가 막혀 또 한 번 웃었다. 도봉구 한 마트 앞에서 생을 놓고 싶어 어찌할 바를 몰랐던 나의 ‘虛無’가 떠올라서 헛웃음을 웃고,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고 나니 그 ‘虛無’가 결국 무언가를(그 무언가는 결국 삶에 대한 의지나 희망 한 줄기였으리라) 채워 넣고 싶은 ‘虛’였음을 알게 되어 웃었다. 나의 우울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아무리 못 살아도 육십 년은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시인이 ‘나는 육십 년간’에서 ”나는 육십 년간 죽어 있는 세계만 바라보았다. 이젠 살아있는 세계를 보고 싶다. 사랑 찌개백반인 삶이여 세계여“라고 했듯, 나 역시 ‘사랑 찌개백반’인 세상에서 보글보글 끓으며 살아가야겠다고, 그게 바로 ‘虛’라고, 虛, 虛, 虛 웃으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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