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래 어느 작은 밭에는
분홍 그리고 흰색으로 층층이 피어날 꽃송이를
밤낮으로 지키던, 아니 사모하던
길쯤하고 그 끝은 칼 같은 잎들이 있었다
어느 날 밤, 달빛에 취하여
어린 계집애같던 꽃송이들이 부끄러움도 잊은 채
하나 둘 꽃잎을 벌리면
잎들은 때가 된 것을 알고 결연히 고개를 쳐들었지만
서걱, 기역 자 낫이 퍼런 날을 번뜩이면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이파리들은
창졸간에 꽃을 잃어 제 사랑을 끝내고서
밭두렁에 함부로 스러지고 말았다
그랬던 잎들은 햇살 아래 마르고 벼리어져
마침내 어느 여름날 초저녁, 밭을 보러 나온
열두 살 소녀의 여린 발목을 쿡 찌르고 베어
기어이 그 순결한 피 한방울을 빼앗고야 마는
그래서 어디론가 머나먼 길을 떠난
분홍과 흰색의, 저들이 사모하던 꽃송이에게
늦게서야 붉고 투명한 한방울 피를 목숨처럼 바치는
얼굴도 모르고 이름은 더더욱 알 수 없어
서럽도록 날카로운 아무개가 되었다
* 글라디올러스는 뾰족한 잎의 생김새때문에 '검투사의 꽃'이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