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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Dec 18. 2023

산책길 채색하기(산책하는이들의다섯가지즐거움, 김연수)

독서노트_39

‘한국 현대소설 읽기’ 과목 기말과제 작성을 위해 소설가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을 고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작가인 소설가 김연수의 이름이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수라는 이름은 어디에선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어서, 이 기회를 빌어서라도 한 번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내가 산책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적당한 산책이 좋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가벼운 산책 정도를 넘어 산이나 숲으로 트레킹하는 것을 즐긴다. 트레킹을 한 번 할 때마다 10km 이상은 걷게 되는데,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든지 10km는 넘게 걸어야 좀 걸은 것 같다고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읽어보니 소설 속 주인공과 나의 산책에는 같은 점도 있었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같은 점이라면 주인공과 나 둘 다 건강을 위해 걷는다는 것이고(물론 주인공은 불면증으로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려고 걷는 것이고, 나는 지금의 건강을 잃지 않기 위해 걷는 것이므로 완전히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다른 점이라면 주인공은 걸을 때마다 동행을 구하여 함께 걷지만 나는 오로지 나 혼자 걷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 점이 책을 읽는 내내 의문이었다. 왜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걸으려 하지? 심지어 잠을 자 보려고 읽은 재미없는 책에 나온 사람하고까지? 불면증 때문에 머릿속도 맑지 않을 텐데 그럴 때는 차라리 혼자 걸으며 머리도 맑게 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낫지 않나? 나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았다. 물론 그건 내가 유난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가족을 제외하면 그 어떤 이와 있어도 혼자 있는 것만큼 편하고 즐겁지 않았다. 밥을 먹든 차를 마시든, 그 외에 무엇을 하든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고 내가 그를 좋아하더라도 나는 누군가를 만나는 그 순간부터 시간이 빨리 흘러 그와 함께 해야 하는 이 모든 일이 종료되어서 혼자 남게 되는 때를 갈구했다. 그런 경향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더 강해지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인 산책을 여간해서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달랐다. 산책을 하면서 건강을 되찾고 잠도 잘 잘 수 있게 되었다는 어느 암환자의 사례를 책에서 읽은 후 주인공은 여동생을 비롯해서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동행으로 삼아 산책에 나선다. 주인공과 함께 산책한 이들 중에는 그의 상황을 잘 이해해주는 이도 있었지만 함께 산책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이도 있었다. 씁쓸한 뒷맛만 남긴 산책을 보며 나는 안타까웠다. 그냥 혼자 걷지, 그랬으면 그런 기분을 느낄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책 속 사례에 소개된 생면부지의 암환자까지 찾아 나서며 누군가와 ‘함께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암으로 투병 중인 사람과 몇 달 째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의 ‘건강하지 못한’ 산책이 과연 그 둘에게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심지어 그들의 산책은 군중의 집회와 그걸 통제하려는 경찰에 의해 갈 길이 막히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들의 산책은 오롯이 그들만의 것도 아니었다. 주인공은 언제부터인지 그의 숙면을 시시각각 방해하고 육체적 고통을 안겨 주는 ‘코끼리’와, 함께 산책한 암 환자는 코끼리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동물’과 같이 걷는 상황인 것이다.


아프고 또 무겁기까지 한 그들의 산책, 처음 보는 이와 호흡을 나누며 주고받아야 하는 이런저런 대화가 모든 것을 홀로 하려고 하는 나에게는 심장 박동을 빨라지게 하는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들 이렇게 해서 얼마나 걸을 수 있을까? 경찰에 의해 가던 길도 막혔는데,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알맹이 없이 겉돌기만 하는 것 같은데 이래서야 어디 오래 걸을 수 있겠어? 그런데 그들은 내 예상을 깨고 조금 더 걸어보기로 한다.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은 암 환자도, 연인을 떠나보낸 주인공도 좋아하는 길이었다. 암 환자와 길을 걷기 전에 주인공은 아홉 명과 함께 산책을 하였지만 산책하는 길을 ‘좋아한다’고 표현한 건 암 환자와 길을 걸을 때가 유일하였다. 심지어는 그 길이 떠나보낸 연인과 꼭 붙어 걸은 거리였음에도. 불면의 밤 동안 주인공은 먼저 떠난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을 떨치지 못해 내내 괴로워했고, 그러한 감정은 건강한 여느 사람과의 산책에서는 극복하지 못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함께 산책한 이들 중 가장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과 걸으며 그 아픔을 한 발짝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몸이든 마음이든 아파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는 것일까. ‘동병상련’이라는 말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나는, 그러나 이들의 산책을 따라가며 아픈 사람들, 더 나아가 약한 사람들이 모여 내는 힘이 결코 약하지 않음을 느꼈다. 암 환자와 불면증 환자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 뒤에서 심장을 수시로 즈려밟는 코끼리는 발을 거둔 채 조용해지고, 암 환자를 내리누르던 온갖 동물들도 그 무게를 감춘 채 숨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상자 속에 들어가서 칼로 난도질되었던 여성이 마법사의 손길 한 번에 멀쩡하게 일어나 관객에게 보내는 환호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며, 실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그리고 일어난다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는 있다. 이 소설 한 편을 읽었다고 해서 혼자 걷기를 좋아하는 내가 갑자기 소설 속 주인공처럼 함께 걸을 수 있는 지인을 선별해서 차례로 산책에 나설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길이라는 건 혼자 걸을 때는 한 가지 길이다. 그러나 한 가지 길을 다섯 사람과 걸으면 그 길은 다섯 가지 색깔의 길이 되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나는 여전히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내 영혼을 어떻게든 홀로 두려고 노력하겠지만 김연수의 이 소설을 읽으며 문득 매일 홀로 걷던 다소 단조로운 길에 가끔은 색을 입혀보는 게 어떻겠나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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