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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an 21. 2024

가루약과 엄마의 새끼손가락

일상기록

사랑스러운 좋으니 작가가 지난 연말에 선물해 준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을 두고두고 되풀이하여 읽고 있다. 시인들의 산문집은 그 자체로 낯설고도 신기한 느낌을 준다. 뜻을 알듯 모를듯한 선문답 같은 암호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속내를 대중에게 드러내다니! 이건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같은, 있을법하지 않은데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도 같은 무언가가 아닌가. 다른 이도 아닌 '시인의 산문집'.


시인의 산문집은 그 자체로 그런 재미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문장이 아름답고 유려하여 읽을 맛이 나기도 한다.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도 그랬다. 시인의 산문집은 시와 산문의 경계를 분명하게 나누지 않고 그 중간 어딘가에서 하늘하늘 춤추고 있는데,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가감없이 담고 있으면서도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감정이 격해지지 않는 것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런 책의 맨 앞에 있는 이야기가 바로 '가루약'에 관한 거였다. 시인이 어릴 적 아팠을 때 어머니가 약국에서 받아온 약을 쉽게 먹이기 위해 가루로 빻을 때 사용했던 오래된 유발과 유봉을 발견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였다. 그 글을 읽으니 가루약을 아주 지겹도록 먹었던 나의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일부

국민학교 1학년 때였던가, 나는 몹시 아팠다. 평소에도 잔병치레가 잦은 편이었지만 그때는 아마 진짜로 아팠던 것 같다. 무슨 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느 날 밤부터 나는 고열에 앓아 누웠고, 그때부터 학교에 못 나가게 됐다. 아마 늦봄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병원에 갔던 것 같지는 않고 동네 약국에서 엄마가 지어 오신 독한 약을 하루 세 번씩 먹어야 했다.


당시 여덟 살이던 나는 알약을 삼키기엔 어렸다. 게다가 병이 중했으니 약도 많았을 거였다. 엄마는 알약을 넘기지 못하는 나를 위해 그 약들을 곱게 빻은 후 밥숟가락에 얹어 물을 조금 붓고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섞은 후 내게 마시게 하였다. 엄마가 어떤 도구를 이용해서 약을 빻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 고명재 시인의 책에 나오는 그런 도구가 우리 집에도 있지 않았을지, 짐작만 해볼 뿐이다.

예전에 약은 꼭 이렇게 접어서 줬었다

약이 많아서 숟가락에 담긴 물 섞인 가루약은 텁텁하고 꺼룩했다. 게다가 맛은 어쩜 그리 쓰던지.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약이 담긴 숟가락을 입에 넣은 채 내용물을 삼켰고, 약 먹기는 적어도 몇 달은 계속되었다. 게다가 그 무렵에는 몸이 정말 안 좋았던지 밥도 못 먹고 엄마가 쑤어 준 진초록색이 도는 녹두죽만 먹어야 했으니 세상 모든 것이 다 쓰게 느껴지던 때였다.


그때 기억나는 일 중 하나로는 '일기 사건'이 있다. 아마 여름쯤이었던 것 같은데, 아빠는 엄하기 그지없는 분이었고 매일 쓰는 일기를 하루라도 빼먹으면 불호령을 넘어 불벼락을 내리는 분이었다. 아파서 아무 정신 없이 시간을 보내던 나는 그 무렵 몸이 좀 회복되었는지 퍼뜩 일기 생각이 났다. 생각해 보니 아프고 난 이후부터 일기를 하나도 안(못) 쓴 거였다.


나는 걱정과 공포에 사로잡혀 누워있던 자리를 털고 부시시 일어났다. 마침 식구들은 아빠를 포함해서 모두 낮잠을 자고 있었다. 살그머니 책상으로 가서 일기장을 꺼냈으나 이내 아빠가 깨고 말았다. 예의 그 부리부리하고 번들번들한 눈으로 나를 보며 아빠는 물었다. "뭐하냐"

나는 순식간에 콩알만큼 쪼그라들어 생쥐보다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기 쓰려고요.."

그랬더니 아빠는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됐다고, 그냥 누우라고. 영문도 모른 채 나는 다시 자리에 가서 누웠는데, 자비라고는 없던 아빠가 드물게 보여 준 따뜻한 모습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내가 다시 학교에 나갔을 때는 운동장에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져 뒹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쭈뼛거리며 교실로 가서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선생니임~ 하고 부르자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사실 그 선생님은 툭하면 수업시간에 수업 대신 자습을 하며 반에서 생활형편이 좀 되던 애들만 모아 선생님 책상 주변에 빙 둘러앉혀놓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나는 그 무리에 끼지 못했고, 그 애들이 뭔가 선택받은 아이들 같아서 몹시 부러웠으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뭔지도 모르면서 이해해 보려고 애쓰기도 하였다. 그랬던 선생님인데 아무 볼 것 없는 나를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 주다니! 잊지 못할 낯설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지금도 나는 내가 그 때 어디가 그렇게 아팠는지 잘은 모른다. 엄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아팠던 내가 큰 후유증 없이 회복했던 건  엄마가 하루 세 번,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그 많은 알약을 일일이 빻아 새끼손가락으로 저은 후 내 입에 넣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그 새끼손가락은 '너 아픈 거 엄마가 꼭 낫게 해줄거야'라는, 엄마도 모르는 새 나에게 했던 약속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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