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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an 30. 2024

남편의 사택에서

일상기록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있을수가 없었다. 남편이 새 발령지에서 근무하게 되는 날이 화요일이라 평일이었고, 따라서 나도 평상시처럼 근무를 해야 했지만 근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마음 속 소리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남편이 이번에 발령나서 언제 다시 올라올지도 모르는데 추운 겨울날 꼭두새벽에 혼자 차에 짐을 싣고 먼 길을 운전해서 가게 하는 건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해도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루 휴가를 내고 남편이 발령지로 떠나는 길에 동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떠나기 전날, 그러니까 어제 남편은 본사에 가서 사람들에게 나 이제 가노라 하는 인사를 마치고 내 퇴근시간에 맞춰 직장 앞으로 왔다. 우리는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 하다가 둘 다 무척 좋아하는 삼청동 수제비에 가기로 했다. 삼청동은 둘의 직장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퇴근하고 꽤 자주 갔었다. 이제 당분간은 평일 퇴근 후 이렇게 만나서 따끈한 수제비와 감자전을 나눠먹는 일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니 못내 아쉬워서 나는 콧물을 닦는 척하며 눈가도 같이 훔쳤다.


후식으로 커피와 초콜렛을 나눠먹고 우리는 집으로 와서 같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나는 적어도 짐 꾸리기에 있어서는 남편보다 전문가(?)라고 자부한다. 가족여행을 다닐 때 남편은 본인 짐만 꾸렸지만 나는 아이들 짐까지 다 싸주었고, 뭣보다 밍기가 어려서부터 자주 병원에 입원하여 짐을 싸는 건 눈 감고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사택에서 사용할 침대패드와 이불, 베개까지 넣으니 큰 캐리어가 꽉 찼고 그 외에도 자잘한 쇼핑백이 여럿 되었다.


짐을 미리 차에 옮겨 실어놓고 우리는 새벽 5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발령지까지는 적어도 4시간은 걸린다고 했기 때문이다. 휴대폰 알람을 새벽 4시 20분으로 맞춰놓고 누웠지만 나는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그건 상관없었다. 가는 길에 차에서 자면 되니까. 아무튼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였을 무렵 알람이 울렸고 나는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를 하고 있으니 애들이 슬슬 안방으로 들어왔다. 지금 겨울방학 기간이라 애들은 아주 신나게 야행성 생활을 즐기고 있기 때문에 새벽에 우리가 나가는 걸 볼수가 있었던 것이다. 11년 전 남편이 강원도로 갈 때 큰애는 7살, 작은애는 5살이어서 애들은 아빠가 멀리 근무하러 가야 한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때는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워서 주중에도 한번씩 집에 왔으니. 그러나 이번엔 그렇게 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고, 그래서 평일에 아빠를 못 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애들은 저마다의 아쉬움을 가득 안고 어정어정 아빠에게 다가가서 안기고 부비댔다.


아이들의 배웅을 뒤로 하고(남편은 애들에게 "아빠 간다" 라고 안하고 "다녀올께" 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게 뭔가 위로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짠했다) 차를 몰고 나와보니 바깥은 온통 깜깜했다. 내가 동행 안했으면 이 깜깜한 속에 혼자 갔겠구나 생각하니 역시 같이 가길 잘했다 싶었다. 물론 잠이 부족해서 도중에 아주 숙면을 했지만.


남편의 사택은 꽤 규모가 큰 아파트였고 한 세대를 혼자 사용한다고 했다. 근무지에 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사택에 들러 짐을 부려 놓았다. 남편은 집을 대충 둘러본 후 근무지로 갔고, 나는 남아서 짐 정리를 시작했다.

넓다못해 휑한 거실
혼자 눕기에는 어쩐지 커보이는 침대

짐을 쌀 때는 뭐가 많은 것 같았는데 정리해놓고 나니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이야 시작이니 이렇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공간에도 남편의 물건이 하나 둘 늘어나겠지. 그 물건들이 얼마나 많아질 때쯤 다시 이 사람이 집으로 돌아올까. 나는 남편이 짐을 가져가서 집안 옷장 등에 여유공간이 생기더라도 그 공간을 내 옷가지 등으로 채우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리가 끝난 침대

침대를 정리해 놓고 남편이 집에서 입을 옷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남편이 침대에서 바라보는 건 바로 이 사진과 같을 것이다. 가족을 떠나 절대 가깝지 않은 곳에서 혼자 첫날밤을 보내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 기분이 너무 쓸쓸하고 외롭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남편이 가져온 책과 허리보호대, 그리고 방한용 귀마개

우리는 둘 다 책을 좋아한다. 그래서 결혼하고 살림을 합칠 때 다른 무엇보다도 책이 많았다. 책 보는 취향도 비슷해서 둘 다 유시민 작가를 좋아한다. 남편의 '원픽'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 였다. 이 책을 다 읽은 후 또다른 책을 추천해 주려면 요즘 다소 게을리하고 있는 독서를 다시 부지런히 해야겠다.


혼자 있으면서 갑자기 허리가 아프면 안될 텐데. 남편은 학생 때 다친 허리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툭하면 허리가 고장난다. 이 허리 보호대를 여기서는 쓸 일이 없기를, 그리고 여기는 서울보다 따뜻할테니 방한용 귀마개도 얌전히 자리나 차지하다가 돌아오기를 바라본다.


남편이 먹기 좋게 챙겨둔 영양제

나의 저녁 일과 중 하나는 집에 있는 세 남자에게 각각의 영양제를 챙겨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남자들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여 영양제 먹어~ 라고 말만 했으나 다들 대답만 잘할 뿐 아무도 먹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저녁이면 접시를 세 개 준비하여 각각 먹을 영양제를 담은 후 물과 함께 코앞에 갖다준다. 그래야만 이 남자들에게 영양제를 먹일수가 있다.


남편이 발령나고 큰 걱정 중 하나는 이사람이 과연 영양제를 매일 챙겨먹을 수 있을까 하는 거였다. 나는 휴대용 약통에 매일 먹을 영양제를 담아 가져온 후 생수병과 함께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남편에게는 이미 "영양제 다 안먹고 가져오면 남은 갯수만큼 머리털을 뽑겠다" 라는 협박(?)을 해둔 상태였다. 과연 잘 할지, 그래서 머리털을 보존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지.


짐을 다 정리해 놓고 화장대를 열어보니 누가 썼던 것인지 모를 안경케이스가 안경을 담은 채 서랍에 들어 있었고, 옷장에는 장례식장 방문 때 썼던 듯한 검정 넥타이가 하나 있었다. 그것들이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을 버리지 않는 한, 남편이 여기에 있다가 언젠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그 물건들은 조용히 이 집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여기 또 한 사람이 살다 갔으며, 그를 무척 사랑하는 누군가가 "남편을 잘 부탁해" 라며 자신들을 한번씩 쓰다듬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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