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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Feb 04. 2024

너의 손전등

일상기록

일요일 밤, 수학과외가 끝나고 건명이가 내 옆에 누웠다. 수업받느라 고생했어~하고 쓰다듬어 주는데 녀석이 불쑥 물어본다.

"엄마, 엄마는 열심히 했다는 기준이 어느 정도야?"

그 질문을 받으니 내가 태어나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두 번이 떠올랐다. 한 번은 고3때,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때다. 사실 나는 평상시에도 별로 꾀를 안부리고 꾸준히 공부를 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한다'의 기준이 꽤 높은 편이었고, 그런 내가 스스로 열심히 했다고 인정했던 두 시기는 정말 온 몸을 불살라가며, 다시 해도 이보다 열심히 할 수는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공부한 때였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애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내 눈에 찰 정도로 공부를 하려면 그냥 적당히 해서는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입시와 관계가 없던 중학교 2학년 때에도 수업시간에 몰려오는 잠을 쫓기 위하여 필통에 바늘을 갖고 다니다가 잠이 오면 내 손바닥을 찌르던 '독한' 애였다. 그런 내가 마음먹고 애들을 공부로 잡기 시작하면 그냥 끝나지 않는다. 애들은 분명히 내 기준을 따라오기 버거워 할 것이었고, 나는 애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상처를 주고 말겠지. 모두에게 손해만 남을 뿐인 그런 게임은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게 옳았다. 그리고 공부는 절대로 억지로 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는 나의 신념이 있기도 했고.


건명이가 그렇게 물어본 이유는 오늘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과외선생님에게 혼이 났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의기소침하고 우울해 있었다. 제딴에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주변에서는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자꾸 뭐라고 하고, 성과도 나오지 않으니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녀석은 내 팔을 베고 누워 흐느껴 울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 휴지를 쥐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는 이유는 네가 많이 힘든 걸 알기 때문이다. 너는 나에게 어떻게 하면 열심히 할 수 있냐고 묻지만 나는 고3이 되기 전 성적을 잘 받아본 학생이었고 공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아직 그게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느냐. 지금 네가 그런 상황에서 포기하거나 놓아버리지 않고 버티며 앞으로 나가려고 애쓰는 것만 해도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공부하라고 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말은 주변에서 너무나 많이 듣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말 대신에 네가 언제라도 기댈 수 있고 손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겠다. 네가 걸어가고 있는 터널에 엄마가 전등을 켜고 같이 걸어 주겠다.


녀석은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내 손을 잡은 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말해준다 하여 아이가 해야 할 공부가 쉬워지거나 양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공부에 대한 중압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아이의 공부를 대신 해주거나 시험을 대신 봐줄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가 걸어가야 할 '입시'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이 조금이라도 밝아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녀석이 울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팔이 아파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라도 손전등을 켜 줄 것이다. '믿음'과 '사랑'이라는, 내가 죽고 나서도 닳아 없어지지 않을  건전지를 손전등에 넣어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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