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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Feb 14. 2024

너의 영원한 안식을 축하하며

일상기록

내가 빨간색을 좋아했던가? 알쏭달쏭하다. 아니, 사실 나는 하늘색을 좋아한다. 눈을 시원하게 해 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하늘색. 그런 내가 왜, 무슨 이유로 몸에 빨간 띠를 여봐란듯이 두른 너를 들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너를 집어들고 계산을 한 후 사무실 내 책상 오른쪽에 살포시 놓아두었던 게 언제였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3년, 4년, 아니 더 오래 되었나. 하루에도 수십 아니 수백 번씩 '클릭' 소리를 내며 너는 '야박한 주인아 이정도 썼으면 나를 좀 쉬게 해 다오' 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제 너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뿐이다.


단 한 번의 언질도 없이, 너는 동백꽃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듯 갑자기 생을 끝내 버렸다. 뒤늦게 먼지를 털고 건전지도 바꾸고 탁탁 두들기며 부산을 떨어봤지만 너는 눈을 감고 입을 꼭 다문 채 먼 길을 떠나 버렸다.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무덤 자리를 찾아간다는데, 어쩌면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어느날 갑자기 수명을 다한 네 동료들이 쉬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왼손 검지손가락이 닿았던 부분은 반질반질해졌고, 등딱지에 선명하던 로고는 어느새 닳고 닳아 안개처럼 희미해졌다. 어느 바닷가 몽돌마냥 작고 납작해진 너를 보며 나는 20여년 전, 고등학교 시절 쓰던 영어사전을 떠올린다. 손때가 묻고 또 묻어 영어사전이 거뭇거뭇해졌을 때,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를 만났다. 단어가 잘 외어지지 않아 힘들어했던 나, 며칠 전에 외었던 단어가 시험에 나와 기뻐했던 나, 단어를 잊고 또 잊어도 '누가 이기나 보자'하며 다시 덤벼들던 나.. 그리고 나는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숨을 거둔 너를 만지작거리며 또 한번 나를 만나본다. 보고서가 잘 써져서 신이 난 나, 화가 나서 항의메일을 쓰던 울그락불그락하던 나, 초점없는 눈으로 기안문을 작성하던 나.. 그 어느 때에도 너는 단 한 번도 싫다 한 적이 없었다.


내가 퇴근하고 나면 깜깜하고 차가운 사무실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을 나의 친구야, 오늘밤은 내 곁에 있으렴. 나는 너를 위해 방을 따뜻하게 하고 은은한 조명을 켜 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있던 자리에는 너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하지만 아직 사용감이 낯선 네 후임이 눈망울을 요리조리 굴리며 내가 뭘 해야 할까 궁리중일 것이다. 그 친구에게 살짝 물어봐 주렴. "클릭 한 번이면 보고서가 자동 작성되는 기능은 아직 멀었니?"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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