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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Feb 23. 2021

내가 있지만 내가 없었던 그 때

난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래 난 다 좋아"

그 때의 나는 정말 다 좋아서 저런 말을 했을까.

나는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말 잘듣는 전형적인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할 때면 특별한 의견도 없고, 우유부단한 성격이 강해서 항상 남이 하자는 대로 따라갔다.


학생 때는 내가 쓰려고 가져온 CD플레이어도 친구가 듣고 싶다고 하면 하루종일 빌려줬던 날이 많았다.

분명 그 친구는 나를 괴롭히거나 못되게 구는 친구는 아니었으니 선뜻 빌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CD플레이어를 들고다니던 친구 모습이 문득 떠오르는걸 보면, 그때의 나는 분명 불편했었나보다.

나는 착한 사람이고 그걸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정도는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줏대없는 성향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3 시절 담임선생님은 최대한 많은 학생들을 안전하게 4년제에 보내는 것이 목표였던 것 같다. (그게 아마 학교에서 선생님을 평가하는 기준이었을거다.) 그래서 반 친구들에게 실제 성적보다도 많이 낮은 학교로 안전하게 추천을 하셨다. 물론 그때는 그런줄 몰랐지만, 내 성적엔 그 학교를 가야한다고 하셨다. 결국 선생님이 추천해주는 학교에 수시로 지원했고 그 학교에 합격해버렸다.

기분이 좋은지 안좋은지 헷갈렸는데 여기저기 자랑할 정도는 아닌건 확실했다.


"아 좋은거 맞나.... 그래 뭐 대학교 들어가서 더 열심히 하지뭐..."


나는 또 남을 따라갔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본 적도 없지만 그 와중에 그래도 유일하게 한가지 흥미가 있는 것은 컴퓨터와 관련된 것이었다.

집에서 혼자 허접하지만 내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운영을 했었다. 한번은 플래시 게임사이트를 만들어서 친구들한테 알려주고 같이 컴퓨터 시간에 몰래 게임을 하기도 했는데 그 시간이 굉장히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대학은 소신대로 고르지 못했지만, 학과만큼은 처음으로 소신을 가지고 컴퓨터와 관련된 학부를 선택했다. 이과계열은 아니지만, IT와 경영을 함께 전공하는 학부라, IT 관련 진로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1학년 때 학부제로 공통 전공들을 듣고 2학년 때 3개의 학과중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난 또 똑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신입생 OT날 05학번 선배라는 사람이 나를 붙잡아서 영문 모르고 따라 간 곳은 경제학과였다.

아 여긴 내가 가려던 과가 아닌데... 일단 여기로 왔고 OT니까 그냥 있어보자. 결국 나는 그날 경제학과 친구들과 친해지는 바람에, 2학년이 되어 원래 가려던 과를 가지 않고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그땐 말 못했는데.. 솔직히 경제 공부가 재밌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난 이것 밖에 안돼

소신껏 살아가지 못하는 삶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존감도 낮아졌다.

이것은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해놓고 살아가게 만들었으며, 나의 성장을 방해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을 합리화 시키며 세상을 원망했다.

난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남들보다 뒤쳐진 출발선에서 시작했으며 세상은 매우불공평해. 무엇이 잘 안되면 불공평한 세상탓을 하고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했다.

무책임한 선생님 탓. 가난한 집안사정 탓. 그냥 내가 이렇게 태어난 탓.


어차피 난 이것밖에 안돼 / 낙하산과 사다리 없이 너와 같을 순 없어

낙하산만 준비된다면 / 문제 없어 하늘을 날 수 있어

- 달빛역전만루홈런 <어차피 난 이것밖에 안되>


나도 남들처럼 특별하고 싶고, 멋진 이야기 들려주고 싶은데,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고단한 길, 주말 내내 편의점에서 일해서 번 돈을 편의점에 방문한 사기꾼 아저씨를 만나 다 잃어버리고 돌아가던 날이었다. 하는 것마다 난 왜 이렇게 어설프고 모자랄까.  

산동네 높고 추운 언덕길에 숨이 가쁘게 차오르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무서운 어두운 언덕길 말고 평지에 살고 싶어. 

어른이 되면 홍대 앞에 살면서 공연을 보러 다니고 싶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희망이 있을까?

 

나에게 작은 꿈이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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