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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Mar 11. 2021

가난의 추억: 오르막길 위 우리 집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내가 어릴 때부터 결혼 전까지 살던 동네는 주택들이 다닥다닥 밀집되어 있는 낙후된 동네였다. 전반적으로 가정환경이 넉넉하진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우리 집도 그중 하나에 속했다.

1996 즈음, 초등학생의 내가 살던 우리 집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밖에 나가서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밤에는 무서워서 엄마가 밖에서 기다려주거나 참았던 적도 다. 평소에 온수가  나오지 않아 가스불에 물을 데워서 목욕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릴 때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해서 다른 집이랑 비교를 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주변 환경 탓에 부모님이 특히 고생이 많으셨다.


언덕 위 우리 집

중학교 동네의 높은 언덕길에 위치한 집으로 이사  후에는 화장실도 있고 보일러도 있었지만, 자라는 과정에서 내가 가진 결핍에 대해 느끼게 되는 일들이 많았다.

해외여행은 꿈꿔본 적도 없고 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서 나눠 먹는 것이 우리 가족의 외식이었다. 아주 특별한 날은 동네의 스페인 레스토랑이라는 곳에서 5천 원짜리 경양식 돈가스를 먹는 것이 최고의 외식이었다.

지금은 잘 먹어서 꽤 건강한 편이지만, 당시엔 면역력이 낮고 몸이 상당히 허약해서 동생과 나는 삐쩍 마르고 잔병치레도 자주 했다.

삶의 여유가 없다 보니 당시 엄마는 상당히 예민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아닌 일이나,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에 많이 맞았던 기억들이 상처가 되었다. 엄마의 삶도 그만큼 버거웠던 것이다.


눈물 나는 아르바이트의 기억

대학교에 다닐 때는 시간이 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오래 하고 공장, 백화점, 서점 등등 용돈을   있는 것들은  했던  같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몸이 고되다 보니, 나중에는 적게 일하고도 돈을 많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한 번은 동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날은 시급 3,000원에 주말 10시간 이상을 꼬박 일 일하고 34만 원의 월급을 받은 날이었다.

희한하게 이 곳의 사장님은 현금봉투로 월급을 주셨는데, 내가 월급 받은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걸까. 그날 본사 직원을 가장한 사기꾼이 와서 내 정신을 쏙 빼놓더니, 딱 내 월급의 2배를 싹 빼앗아갔다.

지나고 나니 사기치는 방식도 허술했는데,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당하는구나 싶었다.


그날 사장님은 나한테 돈을 지불해야 하니 내 월급을 달라고 하셨고, 그 봉투를 그대로 돌려드린 후 터덜터덜 빈손으로 집에 걸어왔다. 돌아오는 어두컴컴한 동네의 언덕이 더 높게만 느껴지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겨우 이 돈 벌자고 이렇게 고생을 했나.


엄마, 제발 이사 가자

무엇보다 동네에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 이곳에 사는 가장  고통이었다. 집에 찾아온 낯선 아저씨의 성추행, 원조교제를 하자고 말을 걸어오는 아저씨, 옥상에서 나를  때마다 같이 와서 자자는 아저씨 (결국  사람은 부모님을 다치게 해서 경찰에 잡혀갔다), 혹시라도 대문이 열려있으면  예쁜 구두를 훔쳐가거나 옥상의 빨래를 헤집어 놓는 등의 위협적인 일은 다반사였다.


가장 괴로웠던  항상 내가 지나다니는 길가에 앉아있던 아저씨였다. 중학교  처음 마주친 후로 내가 성인이  후까지 내내 나만 보면 뚫어지게 보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공포스러운 마음에 엄마한테 이사 가자고 애원했지만 살던 터를 옮긴다는  쉬운 일인가. 엄마는 원래  그런 사람이고 해코지는  하는 사람이니 괜찮다며 나를 다독였다.


 곳에 사는 것은 항상 공포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사람 사는 동네가  똑같지 "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겁이 많은 사람이 어릴 적부터 수차례 이런 경험을 하고나여러모로 위축될 수밖에 다.

원래 삶은 이런 일들과 함께 해야만 하니 이것을 받아들여만 하는가? 항상 고뇌했다.  


그 와중에 그래도 성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아빠가 몇 년간 도박에 빠져서 넉넉하지 못한 집안의 돈을 탈탈 털어 탕진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날, 나는 울면서 아르바이트를 때려치웠다.


더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

나는 좀 더 나은 삶을 갈망하고, 나와 내 환경이 바뀌길 간절히 원했다. 당시에 화가 나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긴 했지만,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20대를 살다 보니, 서서히 삶이 안정되는 날이 찾아왔다.

많은 대출을 받긴 했지만, 직접 벌어서 모은 돈으로  집도 사고 언덕길이 아닌 내가 꿈꾸던 평지에   있게 되었다. 나를 오랜 시간 괴롭혀오던 공포감도 놀랍게도 줄어들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높은 연봉을 받고, 돈을 아무리 열심히 모아도 원래 집안 환경이 부유했던 사람보다 많은 부를 가지진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고생의 시간들이 어느 정도의 보상으로 돌아올  있다는 믿음만큼은 분명해졌다.


 정신을 괴롭힐 만큼의 가난한 수준을 벗어나고 나니, 금전 보유량의 차이는 인생의 행복을 구분하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 아직은 어렵지만, 누군가와의 비교를 하기보다는  삶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곧 재개발이 되어 추억으로 사라질 오르막길 꼭대기 우리집. 조만간 우리 가족도 그 집을 떠나게 된다.

어린 시절 주었던 결핍은 내가 더 열심히 살아갈 원동력을 주었다.

이제는 가난과 언덕길을 추억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환경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내가 작은 희망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며 살아간다.


요즘 끝도 없이 오르는 부동산가격에 어려운 취업으로 2030에게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본다. 열심히 노력해도 원래 가진 재산없이 20대에 서울에 집을 사긴 어려울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잃지 않으면 좋겠다. 세상엔 수많은 길이 있다.


가난이  괴롭힐  있어도, 마음만큼은 가난해지지 말자. 9 숫자들의 이야기처럼, 높은 마음으로 살아보자.  삶은 점점 나아질 거니까.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평범함에 짓눌린 일상이 사실은 나의 일생이라면

-9와 숫자들의 <높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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