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라일락 냄새가 무심하게 지나가는 나를 붙잡아 돌려 세운다. 일년에 단 한 번 코 끝을 스치고 지나가 버리는 라일락의 향기.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다가도 그 향기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 번 거리며 찾는다. 역시 너였다. 나의 첫사랑, 라일락. 연한 보라색의 꽃망울이 가녀린 듯한 얼굴을 수줍게 보여주지만 그 향기만큼은 짙고 짙어 탐스러워 그 향기에 잔뜩 취해 가만히 머금고 돌아온다. ‘첫사랑의 시작’이라는 꽃 말을 가지고 있는 라일락의 향기에 취한 날이면 이 노래가 생각난다.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어느 찬비 흩날린 가을 오면
아침 찬 바람에 지우지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이문세>
노래를 듣고 있으면 가슴 속까지 울리는 노랫말에 아련한 눈빛이 되는 것을 어찌할까. 하루 종일 리플레이를 하며 지칠 때까지 듣고 따라 부른다. 무엇이 그리워서, 무엇이 아련해서 듣고 또 듣는 걸까.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내 마음이 닿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없기에 아쉽고 붙잡고 싶고 쉽게 놓아줄 수 없는 마음들이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꽤 길고 오래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본 나의 사랑은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었다라는 생각을 한다. 너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사랑이 아닌 나의 사랑에 내가 취해있던 그런 사랑이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온통 ‘짝사랑’으로 꽉 차 있다. 물론 단 한 사람이다. 3년 동안 지루하고 좌절하며 나름 고민으로 꽉 찼던 시간 사이사이 웃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출구였다 그 선배는.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좋아했었고 우리 둘이 주고 받던 교환일기장에는 온통 그 선배 이야기 뿐이었다. 서로 그 선배가 나타나는 시간이 되면 복도에 지키고 서서 안 보는 척 흘끗 쳐다 보기도 했고, 운동장에서 농구하는 모습도 몰래 몰래 지켜보면서 또 한 번 얼굴을 봤다고 두 볼이 발그레해졌던 그 시간들이 있었다. 어쩌다 하교 길에 마주 치면 멀찌감치 떨어져 가면서 뒷모습을 보며 좋아했었다. 가슴이 절절하게 끓고 아픈 그런 감정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 감정에 이끌려 보고 또 보고 싶은 마음 속의 그리운 보물 같은 짝사랑이었던 것 같다. 어쩌다 바로 옆을 스치는 날이면 영화 속에서나 봤던 슬로우 모션이 내게 펼쳐지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좋아만 하다 고백다운 고백은 아예 하지도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 가슴이 아프고 쓰라렸던 추억이 아니라 그 때의 일을 생각만해도 손이 오그라드는 감정들에 민망한 웃음이 퍼져 나온다. 가끔 보고 싶다. 그 친구도, 그 선배도. 세월 따라 시간에 스며든 우리들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떨리고 좋아서 깡총깡총 뛰며 호들갑을 떨었던 고등학교 시절. 주위의 모든 친구들이 그 선배가 나타나기만 하면 알려주느라 소리지르고 나를 찾았던 그 시간들. 각 자 공부하느라 미래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지치기도 하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시간들이 많았지만 그 틈에서 켜켜이 쌓여갔던 3년의 시간들이 아련하게 남는 5월의 아침이다.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지칠 줄 모르는 수다들과 매일 터지는 사소한 사건들에도 자지러지게 웃고 놀라워했었던 그렇게 아름다웠던 시절들이 떠오른다.
라일락 너라는 향기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