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서서가만히 #정명희 #어크로스 #어크로스A.B.C
갈게요.
그 그림처럼 계세요.
찾을게요.
누군가 이렇게 말을 해 준다면 하루 종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중앙 계단을 올라가 사방이 뻥 뚫린 그곳을 가장 좋아한다. 물론 산책길도 하루 종일 사색을 하기에 정말 좋지만 남산 타워가 보이는 그곳에 앉아 있으면 온종일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집 근처라면 자주 가서 산책도 하고 멍하니 남산 뷰도 보고 올 수 있을텐데 마음을 먹어야 갈 수 있는 곳이라 안타깝다.
워낙 크고 전시된 유물이 많아 하루에 다 본다는 건 무리다. 주로 특별전이 있을 때 가서 한 번 씩 돌아보고 오는데 매 번 새로운 기운을 받는다. 예전에는 공부를 한다는 느낌 때문에 박물관에 가는 일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요즘에는 유물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그 시대로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정교함과 소박함 또는 화려함에 감탄을 하기도 한다. 유물에서 어떤 에너지를 얻는다고 해야 할까? 뒤돌아서면 다시 현 시대의 사람으로 돌아오지만 유물 앞에서는 그 시대를 잠깐이라도 다녀온 느낌이다.
“유물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기억한다.
과거를 보여주는 유리 구슬처럼 우리는
갈 수 없는 어떤 곳을 보여주다가도
어떤 날은 거울이 되어 우리를 비춘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연결해 주는 것 같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존재의 이유를 유물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고요한 시간 속에 머무는 그런 느낌들이 좋아 박물관을 종종 찾아가는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네 가지의 주제로 유물들을 소개해 준다. 유물 하나 하나에 담겨있는 의미를 일기를 쓰듯 풀어주어 연기처럼 마음으로 스며들게 한다. 왕실의 아버지와 딸의 다정다감한 편지들, 두 개의 반가사유상의 신비한 힘, 두 개의 기마인물형 토기를 두고 벌이는 현시대의 두 사람의 열띤 수다, 종이와 붓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화원 백은배의 화첩 등을 담백한 필체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명작에는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있다.
어줍지 않게 함부로 쓸 수 없으면서도,
누구에게든 열려있고 자신의 느낌을 얼마든지 갖게 할 만큼 여유롭다.
어떤 전시를 봐도 보는 각 자의 마음에 와 닿는 시간과 지점은 다르다. 조용히 놓여진 유물에
마음이 물들어 촉촉히 젖어 드는 그 순간이 좋다. 이제야 진정으로 유물들을 바라보는 눈이라도 생긴 걸까.
어쩌면 유물과 함께한 시간보다
유물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아온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다른 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볼 수 잇다는 것은
박물관에 매일 출근하기에 누리는 즐거움이다.
5월, 향긋한 꽃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그곳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에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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