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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전 열한시 Jan 16. 2022

시래기를 말리며

살림을 하는 것은 계절을 가장 가깝게 느끼는 일이다.

장바구니에 계절을 담고 부엌에 서서 계절을 다듬는다. 때마다 꽃놀이와 단풍 구경을 가지 않아도 부엌에서 온전히 맞이하는 계절은 아름다운 풍경보다 더 많은 말들을 내게 건넨다.

책을 읽거나 명사의 강의를 듣지 않아도 내가 계절만큼 깊어지는 까닭은 어쩌면 살림 탓이리라

다소 번거롭고 귀찮은 일들을 참고 해내는 과정이 수행자의 모습과 아주 조금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철이 든다는 것은 입에 맞는 것만 찾지 않고 하기 싫은 일들에 눈 감지 않는다는 뜻 같다.

마흔이 넘어서야 해마다 김장을 하게 되었고 그 김장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인 무청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서른 즈음의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서울 한복판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시래기를 말릴 수 있었다.

김장날 푸릇푸릇 싱싱한 무청을 씻어 널며 꽁으로 얻은 식재료에 미소가 지어지는 건 해본 사람만이 아는 즐거움이다. 씻어 건진 무청이 꽃다발보다 예뻐서 여러 장 사진첩에 담아두었다.

겨울의 건조함은 가을에 얻어지는 먹거리를 잘 말리라는 계절의 이치였다. 하루하루 사그락 바스락 소리를 내며 무청이 시래기에 가까워진다.

이렇게 잘 마른 시래기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해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 또한 식이섬유가 많아 장 건강에 좋으며, 칼슘과 철분 역시 풍부해 성장기 아이의 뼈 건강에도 좋다. 특히 시래기의 이소티오시아네이트 성분은 항암효과까지 있다니 얼마나 대견한가

무청은 절대 시들지 않는다. 시래기로 익어가고 깊어지는 것이다. 나이가 드는 것이 그저 주름의 개수를 늘려가는 것만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잘 마른 시래기를 씻어 찬물에 불려두었다가 삶아내고 삶아낸 시래기를 겉껍질을 까서 부드럽게 만든다.

시래깃국 한 그릇에 한 계절의 시간이 온전히 담긴다.

오래전 해외살이를 위해 이삿짐을 부치고 마지막 여행가방을 싸던 날 엄마가 담아준 것은 얼린 시래기 뭉치 여러 개였다. 된장과 마늘 등을 넣고 조물조물 무친 시래기는 멸치육수만 내면 라면처럼 끓여먹을 수가 있었다.

엄마는 슬로푸드인 시래깃국을 패스트푸드로 만들어 먼 곳으로 떠나는 딸에게 건네주셨다. 먼 곳에서도 나는 시래깃국을 먹으며 엄마를 생각했다.

사랑은 곧 음식이고 음식은 곧 사랑이란 걸 주부가 되고 엄마가 되어 깨닫는다. 기꺼이 귀찮음을 이겨낸다.

오늘도 콩나물을 다듬으며 생각한다. 욕심을 내려놓고 사랑만 하기로 한다.

살림이 그렇게 나를 철들게 한다. 겨울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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