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비움
세상에 버려지는 모든 것들에는 쓸쓸함이 깃든다.
아이가 입고 신던 것들을 수거함에 넣을 때나 오랜 시간 살을 비비던 소파가 집이 아닌 밖에 덩그러니 놓여 비를 맞던 날, 나는 왠지 마음이 아렸다. 단지 물건일 뿐인데 함께했던 시간만큼 나는 마음이 쓰였다. 그것들이 참 짠했다.
나도 내 아버지처럼 나이를 먹은 것인지, 그런 아빠를 닮은 것인지 유행이 지나고 낡아 이제는 입지 않는 트렌치코트 한 벌을 버린 엄마와 시시때때로 다투셨던 아빠를 이제는 이해할 것 같다. 아빠는 옷이 아닌 추억을 버리는 일이 못마땅하셨던 거였다.
어쩌면 젊은 시절 입고 계셨던 그 코트는 아버지 젊은 날의 상징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진 속의 아빠는 코트를 휘날리며 출장길에 동료와 웃고 계셨다.
모든 버림의 기준은 내 마음에 있다. 미련이 없을 때 비로소 보내줄 수 있다.
입지 않지만 간직하고 싶은 옷 한벌쯤 남겨 둔다고 우리 집이 쓰레기 더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애틋하지 않은 것들을 비워내면 된다. 미니멀 라이프는 남겨두고 싶은 것들을 위한 라이프다.
아이가 크고 나면 버려지는 자석칠판도 우리 집에서는 고등학생이 된 아이가 여전히 잘 쓰는 물건이다.
비움의 이유와 남겨둠의 기준은 모두가 다르다. 그리고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입지 않는 배냇저고리와 아이를 둘러업었던 포대기가 아직 우리 집 옷장 속에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비울 생각이 없다. 더 낡은 아기띠는 버렸지만 포대기는 어쩐지 아기띠보다 애틋했다.
언젠가 내 손자들을 저 포대기로 업어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과거의 물건에서 때로 미래를 본다.
추억을 모두 안고 살 수는 없지만 잠시 추억을 꺼내보는 일은 지금을 더 충실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한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애틋해진다.
다 버려도 버릴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는 것이 인생이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처럼 우리에겐 추억을 담아둔 상자가 때로 필요하다.
벚꽃이 질 때, 문득 그리워할 사랑 하나쯤은 남겨두어야 봄이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