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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전 열한시 Sep 10. 2020

빨래 건조기를 사지 않기로 했다.

우리 집 세탁실을 본 사람들이 자주 던지는 질문이 하나 있다.

                  “빨래 건조기는 없나요?”


그만큼 건조기는 이제 필수가전이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주부의 삶이 건조기의 발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하니 어찌 구매욕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 역시 애매한 세탁실 구조만 아니었다면 별 고민 없이 건조기를 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빨래 건조기만 있으면 빨래를 너는 노동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될 수 있을까?


놓을 자리가 없어 쇼핑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던 건조기는 장마철이 다가올 때면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십 년이 훨씬 넘은 살림 경력자의 쇼핑은 그리 간단하게 성사되지 않는다.

쇼핑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은 깨달음이다.

무언가 필요한 물건, 갖고 싶은 물건이 생길 때면 시간을 두고 단점부터 찾는다.

제품명과 단점이란 단어를 넣어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다 보면 생생한 후기들 속에 실 사용자들이 말하는 진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쇼핑몰의 후기는 평점이 낮은 순으로 찾아본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감수할 수 있는 단점인가를 생각한다.


빨래 건조기를 사기에 앞서 내가 검색한 단점들은 (장점은 익히 알고 있다.)


옷이 줄어든다 - 아이 옷은 한치수 큰 것을 사야 한다고?


옷감이 손상된다, 얇아진다 - 건조 후 필터에 나오는 먼지 뭉텅이는 먼지뿐만이 아니라 섬유의 일부이기도 하다.


건조 후 바로 꺼내서 정리해야 구김이 없다. - 빨래를 널어두었을 때는 어느 정도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

옷걸이에 걸어 자연 건조한 티셔츠와 바지는 마른 후 그대로 옷장에 넣는다.


건조된 빨래에서 냄새가 날 수 있다. - 일부 모델에서만 나는 현상인 듯하다.


건조기를 실내에 두고 가동할 경우 건조기에서 발생하는 열로 인해 주변부 실내 온도가 높아진다. - 세탁실이나 베란다 공간에 설치하는 것이 좋다.


가스 건조기의 경우 배기관을(연통) 창문 쪽으로 빼야 한다. - 배기의 위치와 바람 방향에 따라 이웃에 피해가 갈 수 있다.


나는 옷을 아껴 입는 타입이다.

좋은 옷은 손빨래를 고집하고 세탁기를 돌릴 때는 손상 방지를 위해 세탁망을 사용하는데 그렇다면 건조기에 쑥 넣을 수 있는 옷은 속옷과 실내복, 양말 정도가 될 것이다. 그것들을 분류해서 일부는 건조기에 넣고 일부는 널어야 한다?

건조기를 산다고 해도 건조대를 완전히 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나로서는 건조기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대신 건조대를 완전히 비울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빨래 건조기의 가장 좋은 점 중 1위는 수건이 보송보송하게 건조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건조가 빠른 극세사 타월을 사용하고 있다. 장마철 선풍기 바람에도 한나절이면 거의 마른다.  


불타오르던 구매욕구를 잠재우는 것은 생각지 못했던 단점들이다.

그쯤 모 전자회사의 건조기가 냄새나는 현상으로 리콜을 실시하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대 유행인 건조기는 오래전부터 서구에서 사용해 오던 생활가전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역으로 가스와 전기 대신 바람과 햇볕을 이용해 친환경적으로 빨래를 말리자는 움직임이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빨래 널기가 금기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멋진 잔디가 깔려있는 그들의 마당에는 빨래가 널려있지 않았다.

80%의 가정이 건조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택업자들이 미관상 보기 좋지 않아서 집값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빨랫줄 건조를 막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뒷마당에 빨랫줄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인 햇볕에 빨래를 말리면 에너지를 절약하고 전기료도 아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빨래 말릴 권리'(right to dry) 법을 제정하는 주(州)가 늘고 있다.

미국의 경우 건조기 사용료가 전체 전기료의 6~10%를 차지한다. 빨랫줄 옹호론자들은 '작은 실천'으로 전력 소비를 줄이고 지구 환경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빨래 말릴 권리'를 아시나요? 2015.12.07 연합뉴스]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고 공기 중에 널어 말리는 것만으로 세탁으로 인한 탄소 배출의 75%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옷장의 탄소 발자국을 세어봐요 2020.2.2 중앙일보]


미세먼지와 긴장마에 건조기는 좋은 해답이 될 수 있다.

아파트의 협소한 건조 공간 역시 건조기의 필요성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온전히 각자의 선택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나의 라이프스타일과 맞지 않으면 그것은 내게 불편한 물건이 되고 만다.

아이들 모두 교복을 입는 나이가 되니 우리 집 빨래의 양도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나는 앞으로도 건조기를 사지 않기로 했다.


생활이 편리해지는 도구의 도움을 받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의 특권이다. 하지만 그 특권을 지구를 위해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에어컨을 적게 쓰고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를 타는 일, 대기전력을 줄이기 위해 코드를 뽑는 작은 수고들

거기에 슬쩍 건조기를 끼워 넣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햇살과 바람을 확인하고는 빨래하기 좋은 날이라 기분이 좋아진다.

가을바람과 볕이 좋은 요즘 나는 그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빳빳하게 마른 하얀 이불보에서 햇빛 냄새가 났다.

마당이 갖고 싶어 지는 그런 하늘이다.


@a.m_11_00

인스타그램에 매일의 살림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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