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시작: 9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1. 이야기의 시작: 9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2. 9년을 다닐 수 있었던 이유
3. 9년만 다니기로 한 이유, 다음 10년에 대한 고민
“어떻게 한 회사를 9년이나 다녔냐”는 질문에 답하려면 꽤 오래 전으로 돌아가야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수다쟁이는 항상 처음부터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첫 회사는 해외 호텔, 리조트와 계약을 맺고 국내 총판 업무를 하는 곳으로 국내 리조트 회사의 계열사 중 하나였다. 여행을 좋아했던 나는 항공사나 여행 분야에 관심이 있었고 막연히 여행업에 종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취업 준비 기간이 1년이 넘어가면서 매일이 불안의 연속이었고 조금이라도 나의 관심 분야와 겹친다면 일단은 가보자 라는 마음 가짐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것과 여행업에 종사한다는 건 다른 얘기다. 취업 준비생의 나이브한 생각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업무가 오퍼레이션성 업무였다. 그 당시 나의 업무도 단순 업무가 많았고 타겟 마켓도 필리핀 위주여서 만족도가 높지 않았다. 입사한지 2개월이 채 안됐을 때 부터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참고 기다리면 새로운 계약도 따보고 출장도 가보고 기회가 열릴 거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2년을 버텼다. 매일 매주 매달을 버텼는데 여기서는 도통 길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봐도 개념 없는 상사도 그 당시 불행의 원인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온라인 베이스의 성과를 트래킹할 수 있는 마케팅 업무였다. 할 수 있는 업무가 주어지는 걸 기다리기 보다는 무언가 다른 시도를 해보는 게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던 중 2015년 말 패스트캠퍼스에서 모집하는 풀타임 직무전환 프로그램 '디지털 마케팅 스쿨 1기' 광고를 보게되었다. 9-18 으로 진행하는 풀타임 코스였는데 그 수업을 들으려면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해야했고 드디어 이 회사를 퇴사하게 될 절호의 기회였다.
간단한 신상정보를 제출하고 직접 캠퍼스에 방문해서 테스트를 치르고 정신차려 보니 3개월 수업료를 할부로 결제한 뒤었다.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생기고 그 수단에 내 손에 쥐어지면 결정을 내리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첫 회사에서 2년을 채우고 퇴사할 명분이 드디어 만들어졌다.
정말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처럼 매일 9-18까지 콘텐츠, SEO, 워드프레스, HTML/CSS, 온라인 광고 집행, 브랜딩 강의... 등의 다양한 커리큘럼을 들었다. 그리고 수업 후에는 매일 2개씩 워드프레스 포스팅을 써가면서 3개월을 꽉꽉 채웠다. 굳이 이런 내용까지 들어야 하나 라는 것들도 많았다. 그 중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워드프레스를 통해서 내 관심사의 콘텐츠를 매일 발행했던 것. 그리고 그 콘텐츠를 커뮤니티, 광고를 통해 확신시켰던 것. 그리고 '구독' 이라는 CTA 버튼을 삽입하여 구독자 리드를 만들고 다시 콘텐츠를 발행하여 재유입시키는 루프를 만들었던 것 이다.
이 모든 게 실제로 실무에서 진행하는 마케터의 업무와 가장 닮아있었다. (가장 괴로웠고 후회된 건 HTML/CSS 인데 이거 진짜 왜 들었나)
워낙 과제가 많아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 내는 게 챌린지였다. 그 당시 패스트캠퍼스의 풀타임 마케팅 스쿨 1기였고 한 반에 20명 내외의 메이트 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을 갓 졸업한 아이들도 있었고, 대기업을 다니다가 퇴사하고 커리어를 전환하기 위해 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고딩들 처럼 하루 종일 붙어있고 점심 도시락 같이 먹고 저녁 자습하고 하다보니 안친해 지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게다가 대단한 결심을 하고 다니던 회사도 때려친 마당이어서 우리의 동질감은 극에 달했다. 서로에 대한 경쟁심도 있었겠지만 정말 메이트들의 성향과 관심분야가 다양해서 이런건 얘가 부럽고 저런건 쟤가 부럽고 내가 부러워하는 능력들을 취사 선택해서 따라해보며 즐거운 3개월을 보냈다.
3개월이 지나서 내 손에 쥐어진 건 워드프레스 웹사이트, 이커머스 관련하여 써내려간 콘텐츠, 자연 유입, 광고 집행 실적에 대한 포트폴리오 였다.
2016년 4월의 어느날 강남역 근처의 고급 오피스텔 부티크모나코. 무슨 건축상을 받은 휘향찬란한 외관 디자인, 실내도 상당한 대리석과 울퉁불퉁한 돌바닥이었다.
"최근에 시리즈 A 투자 받은 내 지인이 있는 회사인데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
디지털 마케팅 수업을 같이 들었던 동기가 추천해준 한 마디 말에 지원한 스타트업 이었다. 처음에 앱을 들여다 봤을 때 참 별거 없어보이긴 했다. 여성 쇼핑몰을 크롤링 해 한 곳에 모아둔 서비스였다. 별거 없어보이긴 했지만 최근 투자를 30억 단위로 받았고 또 어떻게든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해야하는 상황이어서 이것 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아, 회사가 오피스텔에 있구나. 괜찮은 회사긴 한걸까? 고민하고 의심하며 일산에서 강남까지 면접을 보러 갔는데 당황스럽게도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어야 했다. 주 업무 공간은 거실이었고 작은방 1은 통화가 많은 세일즈 부서가 사용하고, 또 작은 방2는 휴게실로 쓰이는 공간으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 마저도 면접을 보기에 적합한 테이블과 의자가 없어서, 사무실을 한번 쓰윽 둘러본 후 건물 1층에 있는 일리 카페에서 1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말이 면접이지 면접관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업, 스타트업에 대한 생각, 엄청 힘든일이어서 각오해야한다는 일장 연설을 듣다가 나왔다. 내가 답변을 한 시간이 2, 면접 CMO(면접관)이 말한 시간이 8 정도의 비중이었다. '되게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많고 말이 많으신 분이구나'
그리고 또 바로 다음날 전화가 왔다. 전날 제대로 물어보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다고. 그리고 또 바로 하루 만에 디지털 채널 전략을 한 페이지에 짜달라고 과제도 부여받았다. 과제 시한으로 하루를 요청한거면 엄청난 내용보다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에 대해 궁금했었던 것 같다. 그래도 하루는 좀 너무 하지 않나? 깊을 고민을 하기 보다는 내가 이정도의 프레임을 짤 수 있다 라는 마음으로 뚱땅대며 1페이지 과제를 제출하고 그 날 바로 연락이 왔다.
얼렁뚱땅 후르륵 그렇게 나의 9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