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휴식 아티스트 입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하게 되면 좋을까?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누군가가 시키는, 여기저기서 떨어지는 일 더미로부터 나를 구하고 싶다였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휩쓸리지 않고 살고 싶은 바람이었다. 오해받기도 싫고 그렇다고 오해를 풀고 싶은 에너지도 없었다.
오롯이 내가 내 시간을 쓸 수 있어서 좋았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걸 먹고 핫 플레이스에 평일에 가면 사람도 없고. 진짜 내가 나에게 주는 방학이었다. 어디 멀리 여행을 가고 싶지도 않았고 기존의 내 생활 반경 안에서 그저 여유를 즐겼다. 그것만으로도 휴식이었다.
다만 한 달이 넘어가니 좀 심심해졌다.
최근까지 가장 친한 친구들은 내 옆자리 동료들이었다. 일하다가 친해진 사이. 회사를 짧게 다니지 않았는데 그동안 만났던 친구들 중에 가장 많이 가까워졌다. 매일 출근해서 아침부터 커피 마시고 시답지 않은 일로 떠들고 깔깔대고 다른 팀 욕하고 동고동락한 친구들을 이전처럼 매일 볼 수가 없어졌다.
사실 커리어 초반에는 회사에서 친구를 만드는 게 어려웠다. 특히나 같은 직무에서. 비슷한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경쟁해야 할 것 같고 내가 쟤보다 잘하고 싶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해 냉정해져야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팀 신규 입사자한테 살갑고 친절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네가 얼마자 잘하나 보자'의 건방진 자세였다. 예전 상사한테도 얘기하긴 했지만 이 부분은 정말 과거로 돌아가면 바로 잡고 싶은 부분이다. 잘해줄 걸. 새로 온 멤버가 잘 적응하고 본인의 역량을 잘 펼칠 수 있게 만들어주지 못한 아쉬움.
아무튼 같은 팀 동료들이 의미하는 바가 커져버렸다. 친구이자 같은 꿈을 꾸고 가장 많은 시간과 생각을 공유하는 소중한 사람들. 손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살짝 멀어진 것 같아서 아쉽다.
다음 직장에서도 서로 시너지를 줄 수 있는 팀원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이제 혼자 노는 게 좀 심심하다. 같이 놀고 싶다.
회사에서의 나는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백수로 한 달 이상을 지내니 어느 시점부터 게으름이 점점 커져갔다. 무언가 하나 해내기 위해 엄청난 마음을 먹어야 했다. 며칠 동안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는 날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 밀리의 서재에서 읽었던 문구를 찾아봤다.
예민한 사람이 책임감이 투철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성실해서 책임감이 강하다기보다는, 책임지지 못했을 때 받게 되는 스트레스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 굉장히 투철한 책임감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민한 사람에게 일을 맡겨 놓으면 그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와는 상관없이 대부분 깔끔하게 일이 처리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겪게 될 고통을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 최재훈
이러한 이유로 게으른 유형의 HSP들은 그나마 일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는 프리랜서보다는 조직 생활이 더 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프리랜서가 훨씬 더 바람직하겠지만, 게으른 HSP들은 상대방에게 민폐가 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상황에서는 한없이 더 게을러질 수 있기 때문이죠. 또한 이제껏 조직 생활을 열심히 해온 HSP가 자신의 성실성을 과대평가하면서 프리랜서나 개인 사업에 섣불리 뛰어드는 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일하면서 이제까지 해왔던 노력이 타고난 성실성 덕분인지, 아니면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책임감에서 발로한 것인지는 확신하기 힘든 문제니 까요. 만일 후자의 상황이라면, 혼자 일하더라도 책임감의 대상이 될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선정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 최재훈
회사에서의 자아도 거실 바닥에 누워 앞 구르기 하는 게으른 나도 둘 다 나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나는 좀 더 부지런한 버전의 나다. 34평 아파트를 혼자 앞 구르기 뒷구르기해도 부지런한 나의 모습은 어디 숨었는지 여기저기 뒤져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직은 누군가와 함께 일하고 책임감을 가지는 생활이 더 필요해 보인다.
"쉴 때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그래?"
어렸을 때부터 혼자 여행하고 뭐든지 혼자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래서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 유럽여행을 갔을 때 새로운 대륙에 여권 도장을 찍을 때마다 내 지도가 넓어지는 것 같았다. 휴가도 최대한 멀리 길게 가고 싶었다. 오래 쉴 수 있다면 지구 반대편 남미로 날아가서 고산을 오르고 싶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졌다. 이번에 백수 방학 때는 해외여행을 가지 않았다. 너무 아쉬울까 싶어서 제주도 여행 정도 3박 4일 다녀왔다. 제주도는 MBTI EEEE인 친구들이랑 다시 가고 싶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제는 누구와 같이 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혼자 여행 이제는 조금 지양하고 싶어 진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있어 봐야 함께 있는 소중함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느끼는 해외여행에 대한 가치의 우선순위가 내려갔다. 그 돈을 내고 갈 만한가? 그 경험이 지금의 나에게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고작 1년에 일주일 가량의 해외 휴가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게 맞나?
뜬 구름 잡지 않고 행복을 내 주변에서 좀 더 찾아보고 싶어졌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