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항구가 있는 바닷가 공원
혼자라면, 또는 어른들만 떠나는 여행이라면 다른 여행지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과 욕망을 강력히 어필하기 시작한 40개월이 조금 넘은 어린이와 동행할 예정이었다. 비행시간이 아이의 난동 없이 견딜만한 한도 내에 있는지, 아이도 즐길 만한 시설이 있는지, 응급시에 찾아갈 만한 의료시설이 근처에 있는지, 교통편이 편리한지 등등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았던 여러 조건들이 중요해졌다.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선택. 한번 갔던 여행지, 그것도 한번 묶었던 숙소를 또다시 방문하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두 번째 방문이니 익숙함과 여유 속에서 아이를 돌볼 수 있을 것 같았고, 아이의 흥미를 끌 만한 대형사파리나 케이블카, 워터파크가 있어 다른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합격점을 주었다. 바닷가 모래놀이나 수영장 물놀이에 지겨울 때 즈음 고민해볼 수 있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점은 유아동반 해외여행에서 든든한 비상식량같은 것이었다.
캐리어에 넣어가는 짐에도 변화가 있었다. 가장 먼저 챙긴 것은 구급상자였다. 온도계나 해열제 없이 국내 여행을 갔다가 아이가 고열이 나는 바람에 허둥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열은 실로 예측이 불가하다) 온도계와 해열제를 기본으로 연고와 습윤밴드를 챙겨 넣었다. 습윤밴드를 원하는 크기로 자를 수 있도록 작은 가위를 같이 넣으며 나 쫌 많이 야무져 졌네, 라고 착각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이번 여행에서는 구급상자를 열어야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햇볕에 장시간 노출된 피부에 입는 화상. 이로써 교훈을 하나 얻었다. 남국을 여행할 때엔, 특히 바다에서 놀 계획이 있다면 화상연고와 알로에겔을 야무지게 챙길 것.
코로나 이후 첫 해외여행이자 아이와 함께 하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아이도 여행을 기다리는 이 설렘을 같이 느꼈으면 해서 비행기 타고 가족 여행갈거야, 라고 미리 일러주었다.
제주도 갈 때 비행기를 타 본 아이는 제주도 가는 거야? 라고 물었다.
아니, 우리는 비행기 타고 베트남으로 가는 거야. 거기서 모래놀이도 하고 수영도 하고 기린한테 밥도 줄거야!
아이는 그 날 이후 어린이집에서 하원할 때마다 오늘은 어디 가는 날이에요? 라고 물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라고 되물으면 아이는 기린! 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베트남에 가면 기린한테 직접 밥을 줄 수 있다는 얘기가 인상 깊었다 보다. 우리는 몇 밤 자고 베트남에 가서 기린 볼거야! 라고 알려줬다. 그 이후로 아직 시간과 날짜의 개념이 헷갈리는 아이는 오늘은 몇 시에요? 라고 물으며 기린에게 밥 주러 가는 날을 기다렸다.
아이가 16개월 정도 되었을 때 아이와 단둘이 제주 한달살기를 감행한 적이 있다. 그 때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내게 아이와 함께 가는 어디서든 주변 놀이터를 감지해내는 레이더망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남국의 어느 섬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아이가 좋아할 만한 놀거리나 장소를 발견해내고 만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굳이 가지 않았을 대형 사파리와 한국에서도 가지 않는 워터파크...
이 모든 곳을 베트남에서 갔다.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케이블카와 전쟁 때 미군이 남기고 간 군용지프차는 아이를 생각하며 흔쾌히 체험해보기로 결정했다.
아이는 그토록 기다리던 기린을 만났고 직접 당근을 주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새의 시선으로 바다에 떠 있는 배들과 주변의 작은 섬들을 구경하는 건 아이보다 내가 더 좋아한 것 같기도 했다.(거기까지 가서 웬 케이블카, 라고 말했던 나다) 평소에 물놀이는 바다가 최고지, 라고 생각하기에 비오는 워터파크에서는 후회할 뻔했으나 아이가 가장 마지막에 한 파도타기를 무척이나 즐거워 하였으므로 해볼만한 체험으로 정정하기로 한다. 지프차를 타고 덜컹덜컹 숲 속과 바닷가를 달리는 투어는 돈이 조금 아깝기는 했으나 아이를 지프차에 태워주었다는 만족감과 무제한 맥주 제공으로 인해 한번쯤 해보아도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모두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가장 좋았던 곳은 바닷가 앞 공원이었다.
밤마다 여행자들을 위해 불을 밝히는 나이트마켓을 지나 몇 개의 거리가 모이는 끝자락에 작은 항구가 있는 바닷가 공원이 있었다. 시장과 관공서, 카페와 음식점, 그리고 차와 오토바이들이 밀집한 거리를 지나며 응축되어 온 에너지가 단번에 탁 트이는 공간이었다. 풍경도 한가로웠다. 자전거를 타고 와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아주머니. 자녀로 보이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젊은 여성, 벤치에 앉아 대화를 주고 받는 사람들, 어린이 고객을 겨냥한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
그곳에 오후 5시만 되면 오토바이와 각종 자전거, 바퀴가 커다란 몬스터트럭들이 등장했다. 실제 크기에 비한다면 장난감처럼 축소시켜 놓은 버전이었지만 엄연히 바퀴가 굴러가고 사람이 탈 수 있는 탈 것들이었다. 30분에 3천원 정도면 그 중 하나를 대여할 수 있었다.
미니어처 버전의 탈 것들이 공원에 등장하는 시간에 맞춰 공원 여기저기에 어린이 드라이버들이 출현한다. 대부분 숙련된 운전자들이었다. 앉은뱅이 자전거를 탄 여자아이는 공원을 종횡하며 터프한 드라이브 실력을 과시했고 우리집 어린이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아이는 한 손만 운전대에 얹은 채 다소 거만한 자세로 후진을 하며 장애물을 기가 막히게 피해 다녔다. 그건 좀 놀라운 광경이었다. 몽골에서는 말이라면 캄보디아는 자전거, 베트남은 오토바이가 아닌가. 오토바이 선진국 답게 조기교육의 결과인가, 싶었다. 바퀴가 달린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 꼬맹이와 그 엄마인 내가 그 장면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핑크색 오토바이를 하나 빌렸다. 오토바이의 나라에 왔으면 한번 타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암. 운전하는 법은 간단했다. 페달을 밞으면 오토바이가 앞으로 갔고 운전대로 방향만 조절해주면 되었다. 아이는 반쯤은 긴장하고 반쯤은 신난 표정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공원에서 사고가 날까 아이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어른은 우리밖에 없었다.
그 다음 날은 노란색 몬스터트럭이었다. 그 전날 오토바이를 타며 공원을 누비다가 몬스터트럭을 본 아이는 트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동차 운전에 대한 아이의 로망에 과도하게 감정이입한 나는 내일 꼭 다시 와서 저걸 타자고 약속을 했던 터였다. 아이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다시 공원을 찾았고, 바닷가 한 켠에서 모래놀이를 하며 대여상들이 나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마침내 만난 몬스터트럭은 작동방식이 오토바이보다는 복잡하고 속도도 빨랐다. 자동차를 대여해준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무선조종기를 주고 앞, 뒤, 좌, 우 버튼을 알려주었다. 알고 보니 그 전날 목격했던 아기 운전자의 거만한 자세는 남이 운전해주는 자동차 안이라 가능했던 것. 작동방식이 복잡해진 탓에 아이는 그 전날만큼 독립적으로 운전을 하지 못했지만 로망을 실현한 탓인지 아이는 긴장 속에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물론 트럭을 탄 아이를 보고 너무 멋지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건 나였지만.
활기차고 고단한 거리를 지나면 그 끝에 오아시스처럼 펼쳐지는 바닷가 공원.
야자수 사이로 색색깔의 고기잡이배가 지나다니고 무지개 계단이 바다로 이어지는 곳,
떠돌이 개들이 쏘다니고 주민들이 한 숨 쉬어가는 곳,
낮시간엔 노천 바버샵이 열리고 오후가 되면 꼬마 운전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오토바이와 트럭을 몰았다.
작은 항구가 있는 그 바닷가 공원이 이번 여행의 다른 어느 장소보다도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