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관계 설정
살을 맞대고 사는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와 나는 결혼식이라는 제도적 관문을 통과하고 혼인관계라는 법적인 절차도 밟았다. 그 남자를 공적인 공간에서 남편, 신랑, 아이의 아빠라 소개하고, 어떤 이들은 부군이라는 표현을 써준다. 그 말들이 아직 낯 간지럽다. 남자친구였을 때에는 적당히 원하는 만큼의 무게를 지닌 존재였는데 요즘 그를 지칭하는 단어는 무겁다. 그 남자와의 일상이 그렇게 어른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제도권에 포한된 느낌이 아무 이유 없이 싫다. 혼인신고를 하러 간 날이 떠오른다. 결혼’식’을 하고 3달 정도 시간이 흐른 뒤 휴가를 내고 굳이 함께 가서 남편과 아내 영역에 이름을 쓰고 사인을 했다. 출생신고만큼 숭고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지만 손 끝과 마음 언저리에 느껴지는 감동은 희미했다. 이직할 때 나를 증명하는 몇 가지 서류를 떼었다. 딱딱한 종이 위에 그 남자의 이름과 나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있는 가족관계증명서를 받아보고 그와 나의 관계에 놓인 무게가 사뭇 남달라졌음을 헤아렸다. 그 남자와 나는 21세기에 태어난 한 생명과 묶여 하나의 운명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 얼마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냐고 물었다. 무색, 무취라고 답했다. 그 남자는 그 말에 당황해했다. 나는 그 남자를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희미하게 느껴지는 존재라 여겼고, 그 남자는 그 말을 공기 중에 두둥실 떠다니는 먼지처럼 느끼며 아무 의미를 못 찾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당황한 표정을 얼굴 한 구석에 숨겼다.
살을 맞대고 산다는 의미는 살을 포개고 산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속살이 스쳐도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속살을 버젓이 드러내고 다녀도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함께 살기 시작하고 어느 시간 동안 몸과 몸을 포개어 소파 위에서 뒹굴 거릴 때였다. 침대는 대지처럼 넓었고 집은 우주 같았다. 숨을 구석이 필요 없었고, 숨을 생각은 존재치 않았다. 서로의 속살을 파고 들어 아이를 만들고 아이를 세상에 내놓고 둘이 셋이 될 무렵부터 사랑은 책임으로 애정은 사치가 되어갔다. 나와 그 남자는 소소한 일상으로 뜨개질을 하여 무릎 담요를 만들던 사이었는데 아이와의 일상에서 각자 색깔은 옅어지고 빛 바랜 사진이 되어갔다. 이게 부모의 일상인가 푸념하는 사이에 남자와 여자라는 살아 숨쉬는 색깔도 오래되고 낡은 색으로 탈색되어 갔다. 우리 사이에 놓여있었던,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었던 징검다리는 흔들거리기도 했고, 거친 일상의 물살에 흘러가버리기도 했다. 아이와 가족, 사회 생활과 책임 사이에서 나와 그 남자가 누리고 싶었던, 놓치기 싫었던 고유한 영역은 사치가 되어갔다. 나는 누구야, 여긴 어디야, 꼭 해야 하나,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라는 푸념 섞인 서글픔은 강물 위를 두둥실 떠다녔다. 나와 그 남자 사이의 강은 일상의 침식작용 때문에 깊어지고 넓어졌다. 몇 초 숨 참고 달린 백미터 달리기는 호흡 조절에 신경 써야 하는 오래달리기가 되었다. 숨을 곳이 필요해지고, 때론 도망가고 싶어했다. 도망을 가면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정처 없이 남들이 걷는 길을 걷기도 했다.
그 남자와 짧지 않은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 남자가 오른 공항 버스가 내 자동차를 뒤따르다 지나쳐 갔다. 그가 갔다. 그가 우리 곁에 없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있고, 나와 그 남자의 아이는 나의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리의 곁에 아무것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순간 우리가 타고 있는 자동차가 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한 쪽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옮겨지면서 출렁거리는 물결에 균형을 잃어버리고 기우뚱했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정도의 한숨 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도로를 달렸다. 그 남자가 없는 하루를 온종일 보냈다. 그 남자를 닮은 아이가 좋아하는 연을 날리며 하늘을 바라보는데 그 남자가 타고 가는 비행기가 날아갔다. 품에 안긴 아이가 연신 뽀뽀를 해댈 때 거칠었던 그 남자의 턱이 떠올랐다. 잠든 아이를 들쳐 업고 고요한 집에 들어섰을 때 공허함이 벽처럼 느껴졌다. 잠든 아이에게 내 이불을 내어 주고, 그 남자가 덮던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잠에 들었다. 그 남자의 냄새가 났다.
무색 무취의 그 남자는 어쩌면 나의 모든 공기였다는 생각에 멈춰 섰다. 꽃 덤불 근처에 세상 꽃향기를 모두 품은 공기가 있고, 한여름 강렬한 햇볕 아래에 여름을 품은 공기가 있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두둥실 몸을 실은 겨울 공기가 있듯 그 남자는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닌 그가 만든 세상에 마지막 퍼즐 같은 모습을 한 공기였다.
그 남자 품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서로 머리를 쓰다듬는 밤을 기다린다.
이 남자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