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야기를 하고, 듣고, 서로 나누기를 좋아하는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상경하기 전까지 밥상 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나눠 먹은 사람은 총 다섯명이었다. 아빠는 쉰이 넘어가는 어느해부터 말이 많아지셨다.(남성 갱년기 증상이 아니었나 유추해본다.)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나의 가장 중요한 대화 상대이며, 조근조근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신다.(시골 외할매집에서 이모들이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대단한 여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가 한 두번 아니다. 다들 말이 많으셔서.) 여동생은 대체적으로 말이 별로 없으나 뭔가 스트레스 받는 일이 생기면 속사포처럼 전체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전달한다. 요약 실력이 남다른 것 같아 드라마나 영화 요약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남동생은 그냥 말이 많다. 주로 쓸데 없는 말인데, 우선 한 귀는 활짝 열어두고 듣는다. 한 귀로 흘려버릴지라도.
결혼 전, 대구에 함을 지고 내려간 날 남편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 큰아빠, 삼촌, 작은 엄마 등등 친척들이 모두 나를 반기러 모였다. 결혼 못하고 혼자 살까봐 걱정된 내가 결혼을 한다고 미래 남편과 함을 지고 내려오는 날이고, 그 날 따라 술 맛은 또 기가 막혀서 어른들의 흥이 하늘을 찌르고 우주로 날아가는 자리였다. 온 식구가 말을 했다.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대답을 하는 지 가늠도 안 될 정도로 헝크러진 말들과 추임새가 오갔다. 그러다 갑자기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에 홀린 사람마냥 일어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할머니의 애창곡인 <고장난 벽시계>로 시작해 새 신부가 될 나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끝으로 우리의 댄스 파티는 마무리가 되었다.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노래와 춤이 연결되는 동안 남편은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연신 웃어댄 탓에 얼굴 근육이 마비되어 입꼬리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결혼하고 시댁을 경험하고 나서 알았다. 그 날 남편이 받은 문화적 충격은 우주에서 외계인이 나타나 집 대문에 키카드를 갖다 대며 "너희 집에서 하룻밤만 자자"하는 것과 비슷했다는 것을. 그는 조용하고 고요하고 할 말만 나누는 집에서 자랐고, 나는 세상 모든 일들이 이야기가 되어 집안 곳곳을 둥둥 떠다니다 슬프면 슬프다고 악을 쓰고 울고 불고, 기쁘면 기쁘다고 춤을 추고 세상 떠나가라 웃어대는 집에서 자랐다.
낚시꾼이 물고기 한마리 잡으러 낚싯줄을 던지듯 가족들이 제 말만 던질 때, 여든의 할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내 함 지끼께
그리고 나서 할머니는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이 즐겨 쓰는 단어와 추임새로, 당신의 나이가 묻은 속도로 한티재를 넘어갈 때 부르면 어울릴듯 천천히 흐르는 노래처럼 읊어나가셨다. 그 때 남편은 두번째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된다. '왜 할머니는 갑자기 우리 함을 지키신다고 하는 걸까?' 남편의 커다란 눈동자가 좌표를 잃고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말의 뜻을 알려줬다.
내가 한 번 말할게
'내 함 지끼께'는 '내가 한번 말할게'의 대구 사투리다. 젊은 사람들은 자주 쓰지 않는 나이가 꽤 많은 표현방법인데, 우리 집에서 아주 빈번하게 활용되는 문구이기도 하다. 듣는 사람 없이 말하는 사람만 있으니 부저 누르고 대답하는 퀴즈쇼같은 상황이 명절마다 행사마다 일어난다. 어릴 때 나도 그랬다. 할머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할매, 할매, 내 이야기 좀 들어봐' 그랬고, 큰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큰엄마, 큰엄마, 내 이야기 좀 들어봐' 그랬다. 가끔 어른들은 내 이야기가 귀찮을 때 '저쭈게 가서 놀아라(저기 가서 놀아라)'고 도망쳤지만 쫑알쫑알 거리며 따라가는 나를 완전히 내칠 수는 없어서 듣고 또 들어야만 했다. (물론 한 귀로는 다 흘려버렸을거다.) 그 땐 길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책에서 이야기를 줍고 다녔다. 돌멩이도 이야기를 품고 있고, 구름은 이야기의 힘으로 흘러갔고, 책은 이야기 천국이었고, 엄마는 이야기 제작소였고, 동네 아이들은 이야기 꾸러미였다.
나이가 들면 이야기를 줍고 다닐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더 많은 이야기를 줍고 다니고 산다. 지하철 역사를 오가는 사람들의 뒷꿈치에도 이야기는 매달려 있고, 사람들의 입꼬리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모여 있다. 그래서 이렇게 쓰고 있나보다. 나의 이야기이지만 너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인 수 많은 이야기를 자꾸만 쓰고 싶나 보다. 괜찮다. 나에겐 아직도 풀지 않은 이야기 보따리가 마음 속에 수십개 수백개 남아 있다. 그 속에서 나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이야기를 짓고 싶다. 우린 '내 함 지끼께' 하면 혼자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 이야기 속에 주인공은 내가 아닌 너일 때도 있고, 내가 아닌 너의 일상과 마음이 소재일 때도 있고,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너와 우리를 위한 기도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