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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눈보 Oct 03. 2022

남자로 오해받고 다니다 머리 기른 썰

내가 졌다.

어렸을 때부터 짧은 머리가 좋았다. 긴 머리는 목 뒤가 덥기도 하고, 트리트먼트와 오일 따위를 발라주지 않으면 머리카락끼리 싸움이라도 난 것처럼 험하게 뒤엉켜 일일이 화해시켜줘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랐다. 또 바쁜 아침 시간에 드라이하는데 에너지를 많이 쓰기 싫었던 나의 성향들이 모여 굳어진 취향이었다.

 

그러다 스물한 살부터 서른을 넘긴 나이까지 쇼트커트와 숏단발을 넘나들며 강호동 머리만큼이나 변화 없는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기에 이르렀다. 난 이 헤어스타일이 좋았다. 웬만하면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남자로 오해만 안 받았어도 유지했을 텐데, 해명하는 게 지쳐 백기를 든 셈이다. 남자로만 오해받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운동선수로도 오해받았으니 더 점입가경이었다. 그 와중에  현타오는 포인트는 운동에 운자도 모르는 몸치였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난감할 때는 공공화장실 이용할 때였다. 하루는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내가 들어간 것을 본 꼬마 아이들 떼가 우르르 몰려와 '남자가 여자화장실 들어갔다!!' 하면서 날 쫓아온 적도 있다. 이미 자리를 잡은 나는 해명할 기회조차 없었다. 또, 할머니들이 화장실에 들어온 나를 보고 '오메! 깜짝이여! 아들이여, 딸이여?'라고 물어보시길래 낼 수 있는 가장 가느다란 목소리로 '딸입니다~.'라고 대답하고 볼일을 본 적도 있다.


직장에서는 사회복무요원으로 오해를 종종 받았었다. 다른 과에 서류 제출하러 가면 우편물 담당 직원분이 힐끗 쳐다보고 "왔냐, 우편물 가져가라."하고 손에 우편물을 꼭 쥐어줄 때가 더러 있었다. 쥐어주면 어떻게 했냐고? 그냥 들고 왔다. 누구든 가져가야 하니까 하는 마음으로 가져왔지만, 눈에서 났던 액체는 땀이었겠지.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의 방점은 산불 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불이 나면 산림과 직원과 산불이 난 해당 읍, 면, 동 직원들이 출동해서 진화해야 한다. 산불이 났다는 비보를 듣고 헐레벌떡 길도 없는 야산을 기어올라가다시피 하고 있는데, 면사무소 팀장님이 내쪽을 보며 소리쳤다. "야! 공익 ㅅㄲ 빨리 안 튀어오냐!!" 나는 이내 사회복무요원이 따라 올라오는지 알고 뒤를 돌아봤지만, 그 팀장님 뒤에 있는 건 나뿐이었다. 잠시나마 사회복무요원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순간이었다.


응, 내가 졌다. 10년 동안 잘 싸웠다. 이제 기르자. 지긋지긋하다. 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길렀고, 더 이상 오해를 받는 귀찮은 에피소드는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내 거울을 보다 목 뒤를 덥수룩하게 덮은 머리카락을 괜스레 손으로 묶어보며 요리조리 얼굴을 쳐다보며 생각한다.


'그냥, 한 번 잘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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